아침엔 아기 울음소리로 깼다. 분명히 어느 방에선가 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아침식사를 하고 체크아웃을 하려는 순간까지도 울음소리가 들려서, 너무나 이상해서 한 번 그 소리를 따라가보니 2층의 다른 객실이었다. 이곳에선 게임 히트맨에서나 보던 열쇠구멍[각주:1]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열쇠구멍 사이로 보니 나이가 40대는 넘어보이는 여성이 침대위에서 자고있고 그 위에 아기가 올라타 울고 있었다. 어떻게 아이가 저렇게 우는데 잠에서 안깨어날 수 있지? 주인 부부 내외도 분명히 그 소리를 듣고 있을텐데 별다른 언급이 없다. 오옷.. 이것이 바로 이 마을의 숨겨진 비밀~ 뭐 이런건가. ㅎ_ㅎ 는 망상이고..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어제 밤에 도착한 프랑스에서 뭔가를 -_-;[각주:2] 공부하는 양키 커플 한쌍이랑 같이 주인 아저씨 차 타고 몽생미셸로 떠나기로 예정 되어있었는데 잠깐 짬을 내서 동네 구경을 나갔다.
 


 유럽에 여행다니면서, 스웨덴에 살면서 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덕에 심즈에서 집짓는 기술도 늘었다. -_-; 아무튼, 석조건물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좀 멀리 나가려던 차에 아저씨가 날 부른다. 늦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차를 타고 어제 밤 자전거를 타고 갔던 길을 순식간에 쌩쌩간다. 확실히 불빛하나 없는 밤의 노르망디 라이딩은 위험한 짓이었다.
 


 아침의 몽생미셸은 또다른 느낌으로,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이 아직 그리 많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어가던 즈음에, 그 커플과는 각 길을 갔는데 멀리서 아침에 들었던 정체 모를 아기 울음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같이 이야기 좀 해볼껄 그랬다. 
 


 수도원은 꼭대기에 있고, 입장료가 학생기준 5.5유로다. 몽생미셸을 굳이 세 부분으로 나눠본다면, 공성전용으로 구축한 외성과 성벽들, 주거지역[각주:3] , 그리고 수도원이다. 수도원은 이리저리 미로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고 관광객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통로를 밧줄이나, 문을 닫는 식으로 출입을 막아놔서 일방통행으로 만들어놨다. 이 곳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썩 아름답진 않지만 가장 처음 보게되는 예배당엔 실제로 사제들과 수녀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경건함이 외적인 면을 보완해 주었다.
 


 기념품 가게는 엽서부터 몽생미셸 모형까지 팔고 있는데, 특이하게 노르망디 해변이다보니 범선 모형도 판다. 흔히 알고 있는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던 대항해시대[각주:4] 때 사용되던 카락이나 갤리온 모형을 파는데 수집욕을 억누르느라 고생했다. 중세시대 유적답게 십자군 피규어도 팔고 있는데 정교한 것은 사이즈도 크고 정말 사실적이었다. 
 
 심지어 여기선 중세시대 검도 팔고 있는데, 검까지는 괜찮다. 여기선 총도 판다. 물론 가짜 총이겠지만 퀄리티가 대단하다. 그런데 18,19세기 드라군 기병용 권총[각주:5]까진 이해해도 20세기 너머의 M1 개런드[각주:6]나 MP44[각주:7], M1911 콜트 권총까지 파는건 좀 황당했다. 가격이 괜찮아서 한 번 살까 했는데, 이 총을 들고 공항에 가서 보안검색을 통과할 때 일어날 일을 생각해보니 암담해졌다. -_-; "몸에 벨트나 휴대폰같은거 있으면 꺼내주세요." 라는데 
"잠시만요.. 총이 있어서요." 하면서 주머니에서 총을 스윽 꺼낸다고 생각해보라.. 검문 검색이 심한 미국에선 그 자리에서 사살당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도검이나 총은 그림의 떡이었고 접시에 몽생미셸을 그린 공예품과 십자군 기사 피규어를 하나 샀다. 홉스봄[각주:8]의 책을 읽은 그 이후부터 현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전통들[각주:9]을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에펠탑은 확실히 최근[각주:10]에 만들어진 것인데 19세기 후반에 에 관광지화가 시작된 몽생미셸에 저런 현대식 무기들이 팔리는걸 보니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알고보니 현재의 몽생미셸 모습은 20세기에 또 다시 다듬어진 것이라 한다. 최초의 9세기 몽생미셸은 아무것도 없는 바위섬에 허름한 수도원 하나 뿐이었다. 그런 점에선 몽생미셸도 '만들어진 전통'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여긴 일본인이 정말 많이 오는데, 점심 쯤 다 둘러보고 나가려고 밖에 나오니 정말 끝이 안보이는 관광버스에서 엄청난 수의 일본인들이 내렸다. 끝없는 일본인들의 행렬은 노부부들 깃발투어[각주:11]가 아니라 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구성도 다양했다. 

 의외로 한국 사람은 나 빼고 단 사람도 없었다. 중국인은 서너 명 무리가 있었는데. 요즘 우리나라 유럽여행 풍토가 남들이 따라간 코스 그대로 다라가는게 태반이라, 나같이 파리를 버려버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는 여행에서 한국인 만나는게 어려운 일인건 당연한 듯 하면서도, 몽생미셸을 방문하는 사람이 적은건 아닌데, 단 한 명도 없는건 좀 의아했다.

 몽생미셸에선 종교적 경건함에서 오는 숙연함이나 그런건 없었다. 단지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간듯한 기분에 넋놓고 하염없이 건물 구석구석을 살펴봤을 뿐. 

 몽생미셸에서 오믈렛이 처음 탄생했다고 하는데[각주:12] 여기 오믈렛 가격은 한화로 5만원이 넘는다. 아니, 오믈렛만 그런데 아니라 싸구려 콘 아이스크림조차 5천원 가까이 한다. 우리나라에선 외국인 상대로 어떻게든 사기쳐서 돈 많이 뜯어내려고 내국인/외국인에 다른 가격을 제시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각주:13], 여기선 그런거 없이 당당하게 말도 안되는 가격을 메뉴판에 걸어놓는다. 아 이 당당함. 나는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그 가격에 굴복하고 3유로짜리 싸구려 바게뜨 빵을 사먹었다. 구석에서 우적우적 먹고 있는데 나보고 마실게 필요하냐고 묻는다. 내가 Is it free? 라니까 아니라고 "젠장! 이 자식 눈치 좀 보소 ㅡㅡ"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다. 내가 콜라 마시고 나면 "먹었으니 돈 내! 공짜라곤 하지 않앗어." 라고 했으려나.

 돌아갈 즈음 되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가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손님이 없는 한적한 가게엔 직원들끼리 열심히 수다를 떤다. 엽서 하나를 사는데 옆 사람과 수다떨면서 그냥 가격표를 재빨리 찍고 돈 받고 대충 인사하고 날 보낸다. 뭐, 이 유명 관광지도 사람 사는건 다 비슷하구나. 아침에 일어나서 장사하고 저녁되면 문닫고 집에 가고.

 입구에 엄마가 사준 갤리온 모형을 꺼내들고 아주 흡족한 모습을 짓고 있는 4살정도로 보이는 꼬마애를 봤는데, 정말 그렇게 행복한 표정은 처음 봤다. 이 꼬마에게 지금 이 순간은, 몽생미셸의 경건함도, 십자군 시대의 어두움도, 리비아 사태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는 듯  했다. 오직, 엄마가 사준 이 갤리온 배가 세상의 전부인양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렌으로 가는 익스프레스 버스가 있다고 들었는데 배차 시간이 너무 늦어서[각주:14] 퐁토르송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퐁토르송에선 캉(Caen)을 거쳐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TGV가 아니라서 시간도 5시간이 넘게 걸리고 가격도 40유로 정도 했다. TGV를 안타는 대가로 25유로를 절약하다니. 꽤 괜찮은 거래였다.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봄의 낭만적인 노르망디는 정말 아름다웠는데 한가로이 풀을 뜯는 젖소들과 드넓은 평원을 보자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같은 자리 앉은 프랑스 꼬마애가 인형가지고 난리치느라 바쁜 와중에 나는 그 여러 시간동안 창문 밖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기차는 생 로(St Lo)와 캉(Caen)외 10곳도 더 되는 역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다. 앞의 두 도시는 참 익숙해서[각주:15] 감회가 새로웠다.

 다시 도착한 파리는 여전히 침침하고 우울한 분위기였는데, 다시 알로하 호스텔로 갔다. 호스텔은 더욱더 칙칙해져서 파리 관광할 마음도 안들고, 룸메이트와 잡담할 생각도 없어져서 로비에서 밤이 깊을 때까지 인터넷만 했다. 그 다음날 다시 지하철과 RER B를 타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는 짐 하나가 목록에 없는 것이 더 올라와있어서 보안 검색을 하느라 30분 넘게 이륙이 지연되었는데, 저가 항공사의 단점이 이런건가 싶었다.[각주:16] 덴마크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 문을 들어서는 그 수간부터 시간을 재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스웨덴 내 집 안에 발을 들여놓기까지 딱 1시간 5분 가량이 걸렸다. 외레순 다리 접근성의 위엄에 감탄하며 나의 프랑스 여행을 그렇게 막을 내렸다. 


  1. 히트맨에선 방문 너머를 살펴보기 위해 열쇠구멍을 이용한다. [본문으로]
  2. 음향악?? 철학? 미학? 기억이 안난다. [본문으로]
  3. 지금은 기념품 가게, 레스토랑뿐이다. [본문으로]
  4. 15세기~16세기 [본문으로]
  5. 사실 드라군 권총도 여기에 있기엔 좀 이상하다. 대혁명 이후 관광지로 개방되기 전까진 정치범 수용소로 쓰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2차대전 미군 제식용 소총. [본문으로]
  7. 2차대전 시기 독일군이 사용하던 기관단총. [본문으로]
  8. 영국의 사학자. OO의 시대 시리즈로 유명하다. 자본의시대 혁명의시대 뭐 이런거; [본문으로]
  9. 홉스봄의 저서 <만들어진 전통> [본문으로]
  10. 나에게 19세기는 최근이다. [본문으로]
  11. 길 안잃으려고 선두가 들고있는 깃발만 보고 졸졸 따라가다가 결국엔 여행가서 남는 기억이 깃발밖에 없는 여행 [본문으로]
  12. 나도 다른 블로그에서 본거라 사실인지는 모른다. [본문으로]
  13. 택시비 사기치는 것도 있고. [본문으로]
  14. 4시 30분이었던가? 나는 점심쯤에 자리를 떴다. [본문으로]
  15. 2차대전 관련 게임으로 8년전에 미리 접했다. ㅋㅋㅋ [본문으로]
  16. 덴마크에서 파리로 오는 비행기도 10분정도 늦게 이륙했다. [본문으로]
 


 생 말로는 브르타뉴 지방에 속한 도시로, 파리에서 TGV로 3시간이 넘게 걸리는 매우 멀리 있는 도시다. 브르타뉴는 프랑스 북서쪽 에 있고 그 옆은 노르망디이고 북쪽으로는 영국의 본머스가 있다. 생 말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적들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았는데, 17세기에는 유럽 각국의 샤락 정책[각주:1]에 따라 해적들의 활동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해적 활동은 19세기무렵부터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 지금은 유럽에서 인기있는 휴양지 중 하나[각주:2]가 되었고 크레페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여행을 가면 길 잃기 싫어서 되도록이면 걸어다니는데, 생 말로 역에서 생 말로까지 한참을 걸었다. 도착할 쯤 되니 파리에서 엄청나게 걸었던 것 때문에 다리가 너무 아파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성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 그런 피로는 싹 풀렸다.
 


 파리가 쓰레기와 오물, 부랑자들이 넘치는 음침한 곳이라면 브르타뉴 생 말로는 그야말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였다. 모든 건축물이 옛 방식 그대로 서유럽의 석조양식을 가지고 있고, 거리 어디에도 아스팔트 도로가 없는 그야말로 옛 유럽의 모습이었다. 
 


 계절도 매우 따뜻한 봄이라서 노천카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넘쳐났는데, 평소 까페 이용을 거의 하지 않는 나도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은 충동을 들만큼 거리는 낭만적인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샤락 해적들이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며 피식 웃던 차에 곳곳에 벤치가 마련되어 있는 미니 정원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흔히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하면 당연히 망설임 없이 빅토르 위고와 프랑수아르네 샤토브리앙을 떠올릴 것이다. 이 중 샤토브리앙이 바로 이 생 말로 출신이다. 빅토르 위고는 내 다음 목적지인 몽생미셸의 관광지화에 일조화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샤토브리앙 작품을 읽으면 프랑스보다는 이탈리아를 가고 싶어지니 그의 고향과, 현재의 위상 등을 생각해보면 좀 아이러니 하다.
 


 생 말로는 크레페로 유명한데, 왜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일본 도쿄 여행을 갔을 때 크레페라는 음식을 처음 접해본 결과 그 흐물흐물한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때문에 콘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사진은 이미 절반정도 파먹은 것이다. 베스킨라빈스에 왜 저 맛이 없을까 아쉬움이 들면서, 만약 저 레시피를 알아내서 학교 근처에서 장사하면서 분명 전국적으로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각종 레지옹 깃발들이 걸려있다. 생 말로나 몽생미셸의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고 느낀건데, 저 사진에 나와있는 것처럼 퀘백을 참 많이 아낀다. 
 


성벽 위로 올라가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켈트 해가 너무 아름다워서 파리를 버리고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암초위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황금빛 해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스페인 말라가 쪽을 La costa del sol이라 하여 '태양의 해변'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도 무언가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전망대에도 30분 넘게 그냥 가만히 있었다. 홀로 여행하는 즐거움은 여행 중의 사색과 자유로움에서 온다. 깃발보고 가이드 졸졸 따라다니느라 바쁜 단체 관광객들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이런 여행이 더 취향에 맞는다. 



 중학교 때 활동하던 동호회의 30대 회원 홈페이지에는 유럽 각국을 혼자 돌아다니며 쓴 여행기가 있었는데, 어릴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막연히 나도 나중에 저렇게 혼자 여행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해냈다.  게임 대항해시대 하면서 아일랜드 더블린이 어디있는지 몰라 지구본을 돌려가며 찾던 시절이 어제같은데.

 생 말로에서 퐁토르송으로 가는 버스는 4시 30분에 있었다.[각주:3] 퐁토르송 역에 내려 숙소 주인 아저씨의 픽업을 받아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퐁토르송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시골에  있는 전통적인 석조 가옥으로, 영국인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프랑스에 영국인이 살고있는건 그리 낯선건 아니지만, 처음엔 당연히 프랑스인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저녁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몽생미셸의 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해는 지고 있어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주인 아주머니께 자전거 좀 빌릴 수 있냐해서 자전거를 빌려 길을 나섰다. 자전거로 몽생미셸을 방문하는 사람은 여럿 있었기 때문에 친절하게 쓰여진 길 안내 프린트 종이도 받을 수 있었는데, 밤에 가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각주:4]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 했다. 

 


 숙소에서 몽생미셸까진 자전거를 타고 1시간 -_-;이 걸린다. 엄청난 거리다. 나는 홀로 자전거를 타고 노르망디를 달렸다. 정말 주위에 아무 것도 없었다. 혼자서 소리를 질러도,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가운데에 브레꾸르 마뇨르[각주:5]를 연상케 하는 대 저택도 있었는데, 그 모습에 반해서 잠시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에 개가 컹컹 짖고 주인이 거기 누구냐며 소리를 질렀는데 이것이 진정한 유럽 농촌의 분위기구나 하며 감탄했다. 우리나라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스웨덴은 자전거 앞뒤로 야간 라이딩 시 반드시 라이트를 달아야 한다. 프랑스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다행히 빌린 자전거엔 라이트가 달려있어서 아주 간간히 만나는 차에 치이진 않았다.

한참을 가다보니 저 멀리 아주 조그맣게 몽생미셸이 보였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노르망디 평야 가운데에 홀로 서서 바라보는 몽생미셸의 불빛이란. 에밀리오 알바레스가 이런 느낌을 받았겠구나 싶었다. 


 자전거를 미친듯이 밟아 다가갔다. 최초로 보고서 실제로 가까이 가기까진 30분가량이 더 걸렸다. 몽생미셸이 매우 가까이 왔을 때 수많은 관광객들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나를 미친놈 쳐다보듯 했다. 하긴, 불 하나 없는 밤에 자전거타고 여길 오는건 정신나간 짓이긴 하다.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매우 많았는데 하나같이 빛에 반사되는 형광색 재킷을 걸치고 조심조심 밤길을 걷고 있었다. 다음날 확실히 알게된건데 일본인이 정말 많이 온다. 전체 관광객의 20~30%는 되보였다. 정말 많다. 정말. 일본인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일본인인척 "스게! 스게!"거리고 "스미마셍~ 헨나 바이꾸가 아리마쓰~" 이랬는데 "하이" 이런 대답을 들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불빛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별을 보았다. 정말 별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오리온의 벨트 밑 오리온 대성운 부분의 작은 별들도 보였다. 95년에 책으로만 보던 별자리를 처음으로 봤을 때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하교길에 친구들과 별을 보았다. 날씨가 맑다는 것의 기준은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맨눈으로 볼 수 있냐 없냐로 스스로 정했는데, 노르망디의 밤하늘엔 성단뿐만 아니라 은하 그 자체가 펼쳐져 있었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전거를 세우고 한참이나 밤 하늘을 바라봤다. 베텔기우스가 곧 폭발해서 사라질거라는 뉴스를 본거 같은데, 팔 하나 잘린 오리온은 좀 웃길거 같다.
 
 몽생미셸은 성 오베르가 9세기 대천사 미카엘의 계시를 받아 건설한 수도원으로, 백년전쟁때는 수도원이 아니라 요새로써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18세기 대혁명을 거치면서 성직자계급이 모두 '박살'남에 따라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반혁명분자들을 수용하는 교도소가 되었다. 그래도 알카트레즈 수준은 아니었는지 19세기 빅토르 위고르를 위시로 한 낭만주의 작가들의 찬사를 통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를 낭만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동화속 모습이라면 정말 '관광지'인 이 곳 몽생미셸이 그런 환상을 실현해주는데 더 알맞다. 몽생미셸 수도원 주위 건물들은 모두 기념품가게와 고급레스토랑인데 레스토랑 음식 가격이 한화로 4만원,5만원정도 하니 가난한 여행객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그 나라의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노르망디가 참 마음에 들었다. 숙소로 돌아온 뒤 휴식을 취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것이다보니 방 위치가 아주 이상적으로, 내 방은 제일 고층이었다. 유럽 가옥들은 지붕이 삼각형이다보니 침대 부분 천장이 삼각형으로 관입되어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프랑스에서 별로 살고 싶지는 않은데, '여행지'로는 참 좋은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전에 얼마전 인터넷에서 본 프랑스의 리비아 사태 개입 관련 기사의 리플 하나가 떠올랐다. "병인년에 조선인을 학살한 것도 불란서 놈이요. 병인년에 조선일의 문화재를 침탈한 것도 불란서 놈이요. ~~~" 로 이어지는 리플이었는데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 리플 작성자는 19세기에서 타임머신 타고와서 두루마기 걸치고 키보드를 두드렸을까. 컨셉 한 번 웃겼다. 고전미를 살리기위한 '불란서'. 푸하하. 그리고 폴란드에 장기 출장간 아저씨의 블로그 포스트도 생각났다. 온돌을 사용하지 않는 폴란드인들의 무지를 욕하며 바닥에서 자기를 고집했다는 글이었는데 아마 지금쯤 입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내일 아침의 몽생미셸을 기약하며 잠에 들었다.



  1. 정부가 공인해주는 해적. 유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샤락 해적이었다. 정부 입장에선 나랏돈 안쓰고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니 이득이고, 해적 입장에선 안심하고 노략질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본문으로]
  2. 이 지역만 한 해 방문 관광객 수가 150만명이다. [본문으로]
  3. 17번 버스는 오전9시30분, 오후4시 30분 두차례밖에 없다. 역 바로 옆에 버스 정류장이 있기 때문에 단 번에 찾을 수 있다. [본문으로]
  4. 해지기 전에 가서 해질때까지 기다리는게 일반적이다. [본문으로]
  5. 1944년 오버로드 작전 격전지 중 하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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