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왕족 결혼식이 머나먼 동양에서 온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여행갔는데 마침 그 날이 그 나라 축제날이니까 땡잡은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취미가 위키피디아 읽기라서 영국 왕실에 대해 그래도 조금은 아니까 조금 더 흥미있는 사건이기도 하고. 

  그 전날 밤에 만났던 노팅엄 대학교에서 교환학생하는 여자애랑 일본인 여자랑 아침식사도 같이 하고 잡담 좀 하다가 각자 갈길이 있어 헤어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노팅엄은 우리학교랑도 협정이 맺어있는거 같았는데.. 확실히는 모르겠다. 뭐, 근데 들은 바로는 한국사람 중국사람이 너무 많아서 유럽에 온거같지 않다나 뭐라나. 노는것도 한국사람들끼리만 놀고.

 길거리는 이미 펜스가 설치되고 통제된 상태로, 차는 한대도 찾아볼 수 없고 인도에 사람들은 넘쳐났다. 결혼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애비로 향했다.
  


 정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길이 한 번 좁아지면 그 좁아진 길 통과하는데 몇 분씩 걸렸다. 
  


 특히 여기서 저 반대편으로 가는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결혼식에 하객으로 오는 사람들 모두 다 볼 수 있다. 이 바로 뒤에 고급 레스토랑이 있는데 어차피 결혼식장 안에는 못들어가므로, 호텔 연회장에 설치된 대형스크린으로 중계를 보기로 결정했다.
  


 사실 윌리엄은 왕자가 아니라 공자(공의 아들)인데 동양 왕실 칭호랑 서양 왕실 칭호랑 1:1 매칭이 되는게 아니다보니 번역이 엄청나다 이상하다. 여왕은 엘리자베스 2세이고 그 아들은 웨일즈 군주(공) 찰스고, 그 찰스의 아들이 웨일즈 공자 윌리엄이다. 캐서린 미들턴은 평민가문 출신이지만 아버지가 가구사업에 손대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에선 귀족이라고 봐도 될듯 하다. 이 둘은 결혼하고나서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새 작위를 수여받아서 케임브리지 공작,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이 되었다. 왕위계승 서열 2위니까 내가 나이 50~60쯤 되면 윌리엄이 국왕이 되는걸 볼 수 있을 듯. 

 결혼식은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났다. 찬송가를 어찌나 불러대는지, 유럽이 과거에 종교에 완전 얽매여 살던 세계라는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러다가 어떤 노래가 나오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뭔가 했더니 God save the Queen, 영국 국가였다.
 



 가장 큰 실수라면 결혼식 중반쯤에 이미 자리를 떴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퍼레이드가 아주 천천히 이뤄질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자동차와 말을 이용해서 생각외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나가자마자 성 제임스 공원으로 죽어라 뛰기 시작다. 
 


 버킹검 궁전으로 가는길에 사람들 수는 더 많아서 잘못하면 압사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늦지는 않아서 여왕을 비롯해서 온갖 하객들을 다 봤는데 여왕 지나갈때 사람들이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영국 관광을 그렇게 가도 여왕은 맘대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가, 운이 좋았다.
 



 런던에 있는 근위병이란 근위병은 모두 소집된거 같았다. 식이 끝나고 철수하는 근위대 행진은 정말 끝이 없었다.
 


 다만 복장은 뭔가 19세기풍인데 제식소총이 현대적이라서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맨 뒤에 여자 장교인지 부사관인지 ㅋㅋ 뒤에서 지휘 보조를 하면서 가는데 왠지 웃겼다.
 


 왕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온 척하는? ㅋㅋ) 상징적인 군인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근위대 복장은 언제봐도 멋있다.
 


 결혼식이 지나가건 말건 이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공원은 넘쳐났다. 런던엔 공원이 골목 돌면 나올만큼 매우 많은 수의 공원이 있는데, 런던은 정말 잘 만들어진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있다는 느낌이 확 드는 아주 멋진 도시였다. 
 



 도로 봉쇄가 풀리고 모든 도로가 사람들로 뒤덮혔는데 저 버킹검 궁전 테라스 근처까지 정말 사람들이 빼곡히 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건 처음이었다. 사진에 보면 저 끝에 회색건물이 보이는데, 저곳이 버킹검 궁전이다.
 


 트라팔가 광장에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 생중계를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 2차대전 당시 사용하던 전투기인 스핏파이어,랭카스터 폭격기,허리케인이 비행하고 그 다음엔 아.. -_- 기억이 안나네.. 왕립 공군에서 쓰는 현대식 전투기 두 종이 따라 비행했다. 
 


 공주보다 더 공주처럼 꾸미고온 여성들로 넘쳐나는 축제 한마당.
 


 광장에서 흥분한 관심병 10대들 여자애들을 봤는데, 좀 높이가 낮은 탑에 옹기종기 올라가서 음악에 맞춰 "shake it! shake it!"하면서 온갖 이상한 소리를 내고 난리를 치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찍으면 좋아서 비명 -_-; 지르고.  아침에 만났던 아일랜드 놈보다 더 이상한 애들이었따. 스코틀랜드인이 나보고 아일랜드 놈등른 다 이상하다고 했는데 잉글랜드 사람도 좀 만만치 않은듯..

 템즈강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런던의 축제를 즐겼다. 느낀건데, 확실히 런던은 살기 좋은 곳이다. 도시가 이렇게 잘 정비되어 있는 곳은 처음 본다. 파리에는 슬럼가가 넘쳐나는데 이곳에는 거의 없다는 점도 한 몫 하는듯.

 마지막에 런던 타워브릿지를 봤는데 이미 '대단한' 건축물들을 많이 봐서 감흥이 덜했다. 오후 4시즈음에 gatwick 공항으로 향했다. 빅토리아역에서 특급을 타도 되고 다른 역에서 그냥 가도 되는데 그냥 돌아가는 쪽이 더 싸다. 비행기는 다음날 아침 오전 8시였는데 수속문제를 생각하면 오전 6시쯤엔 여유있게 도착해야되니까 어쩔 수 없이 밤을 새야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출국장에 출입거부당했다. -_-; 너무 일찍 왔다나. 결국 노르웨이 항공 창구 옆 휴게실(은 아니고 그냥 tv랑 의자 몇개 있는곳)에 자리를 잡았다. TV에선 SKY NEWS채널이 24시간 내내 나오고 있었고, 나는 전원 플러그가 있는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했다. 와이파이는 유료인데 나는 에딘버러에서 결제한 와이파이계정이 있어서 런던에서 본전을 뽑았다.

 밤이 되니까 더이상 할게 없어졌다. 뉴스채널은 계속 똑같은 내용이 나와서 결혼식 장면이 머리속에 세뇌당했다. -_-; 공기는 차가워졌는데 반팔 옷밖에 안입었기 때문에 추위에 덜덜 떨었다. 돈을 교통비와 아주 소량의 여유자금만 가지고 온 관계로 식량 사정이 말이 아니었는데 떠날 즈음에 1파운드도 안남게 되었다. 하루 굶는다고 죽는건 아니지만 배가 고픈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돈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늦게 온 어떤 가족은 매점에서 먹거리를 잔뜩 사왔는데 족히 3~4만원치는 되어 보였다. 어찌나 부럽던지.

 자정을 넘길 무렵에 뭐라도 해야될거 같아서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엽서를 다 쓰고나서 출국장에 슬쩍 가보니 통과! 그 때가 새벽 3시 즈음. 출국장 대기소엔 정말 기가 막히게 아주 긴 의자가 침대 시트? 아니 보들보들한 면? 뭐라 해야될까. 기대고 있으면 몸의 열이 보존되는 아주 따뜻한 소재로 된 곳이 있었다. 게다가 3인용 의자인데 팔걸이로 없어서 그냥 대놓고 침대로 쓰라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잠을 청했다. 

 일어나보니 오전 7시가 다 되었는데 휴대폰을 거울삼아 몰골을 살펴보니 참 거지같다. 딱 부렁자. 머리도 헝클어졌는데 거기에 스코티쉬 플랫캡을 눌러쓰고 보따리 하나 들고 있으니. 참 불쌍타. 나중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오면 고급 호텔에서 목에 금목걸이 주렁주렁 달고 더티사우스나 들으면서 놀아야겠다. 

 내가 직접 돈 벌어서 내 돈으로 여행온다는건 참 뭔가 만족스럽기도 하면서 아쉽다. 마지막 순간이 그랬다. 나에겐 74페니가 남아있었는데 빵집이 가보니 죄다 2~3파운드. 아주 조그마한,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사과 종이 있는데, 그 사과가 55페니였다. 동전을 털어 사과 하나를 사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집에 돌아가는 비행기에선 그냥 잤다. 비몽사몽있다보니 내리란다. 심지어 이륙하는 것도 못봤다. 스웨덴에 도착하니 룬드가 지상낙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분명히 가기전엔 날씨도 맨날 흐리고 푸른 잎사귀도 안나는 차디찬 겨울이었는데 여행 갔다온 사이 구름 한 점 없고, 햇살은 쨍쨍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거기에 녹음이 전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그 날은 룬드의 축제날인 valborg(..인가)였는데 룬드에 도착했을 때가 11시쯤. 너무 피곤해서 축제도 뭐고 관심도 없었다.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 잠을 청했다.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느끼는건데, 여행은 관광명소가서 사진찍고 우와우와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각종 에피소드들이 기억에 더 깊이 새겨지는거 같다. 



  


 미미와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숙소가 대영박물관 바로 옆이라서 박물관까지 2분은 걸렸나? ㅋㅋ 하지만 아침 8시 40분쯤 가니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출입도 금지되어있었다. 직원들이 이제 슬슬 출근하고 있는 시점. 9시 쯤 되니 출입이 허가됐는데 그나마도 대부분의 관이 10시부터 입장허용... 그래서 음료수 하나 뽑아들고 박물관 로비에서 수다를 떨고 10시에 다시 출발.
 


 전시품목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일일이 하나하나 보고 가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서 관심가는 것들만 설명을 쭉 읽어보는 식으로 관람했다. (물론 다들 그렇게 관람하겠지만;) 여기에서 제일 인기있는 곳은 고대 이집트관,고대 그리스 로마관인데 고대 이집트관에 가면 대영박물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전시품이 있다. 바로 로제타석, 로제타 스톤이다. 로제타석은 나폴레옹 군대가 이집트 원정중이던 1790년대에 발견하였는데 십여년 뒤 알렉산드리아 조약으로 영국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 후 이 로제타석의 내용은 프랑스인 샹폴리옹이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내용은 대개 고대 비석들이 그렇듯이 "우리왕은 대단한 사람이다." 뭐 이런 내용. 결국에는 약탈문화재인데, 이 로제타석 전시관 바로 밖을 나가면 로제타석 미니모형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나온다. 
 "잘 보셨나요? 이것이 바로 우리 영국의 자랑 로제타석입니다. 서둘러 미니어처를 구입하세요!" 뭐 이런 느낌. 대영박물관에 있는 대다수의 문화재는 대영제국시절 장인의 손길로 한땀한땀 전세계에서 약탈해온 것이다. 결과적으론 전세계 모든 문명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게 되었으니 관강객 입장에서 보면 좋은건지 나쁜건지 약간 애매하다.
 
 한국사람이기에 당연히 한국관을 방문했는데, 아아.. 아무도 없었다. 역시 한국은 아직 안알려진 국가. 게다가 전시중인 것도 별로 없었는데 전시관 내에 붙여진 내용에 따르면 수집가인 한국인 한 분의 기증을 통해 전시관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아니, 다른 나라에 우리나라 유물들이 많으면 안되지.. -_-; 아쉬워할 일이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동영상이나 사진으로만 접하던 연예인은 실제로 보면 신기하듯이, 교과서에서 보던 유물들을 직접 볼때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영국은 모든 박물관이 무료이므로 입장료는 없다. 폐관은 아마도 오후 5시.
 


 미미가 차링 크로스 가는 길 어디쯤엔가 차이나타운이 있다고 해서 같이 가보았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차이나타운. 의외로 규모가 작고 딱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진 않는다. 건물자체가 유럽풍이다보니 그런듯 하다.
 


 곳곳에 중국 마사지 가게가 있는데 젊은 아가씨들이 쇼윈도우에 앉아있고 조명이 홍등인걸 봐서 도대체 이게 진짜 마사지 가게인지 매춘업소인지 확신이 안섰다. -_-; 중국 마사지 가게는 원래 등이 빨갛나. 

 그리고 재미있는건 이 차이나 타운에 한국 가게에 껴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음식과 한국물품(과자나 음료수같은..)을 파는 곳인데 점심시간이었는데도 조용했다. 이왕 온김에 점심을 여기서 먹기로 했다. 가격이 무려 만원이 넘어간다. 제육덮밥을 시켰는데 맛이 짜면서도 매콤하다. 여기 가게 맛이 이상한건지 내가 한국 음식을 안먹은지 반년이 다되가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됐던 간에 배는 채웠고 돈은 나갔다. 나도 미미처럼 자장면 먹을껄.
 
 미미는 전세계 대도시 어디나 차이나타운이 있다면서 자기가 살고있는 캐나다에도 차이나타운이 있다 했다. 내가 우리나라에선 인천 근처 빼고는 차이나타운이라고 할만한 곳이 없다고 하니 놀란다. 흠, 그러고보니 서울에는 왜 차이나 타운이 없을까.  덧붙여서 중국인들은 보통 영어에 성조가 들어가는데, 미미는 세련된 북미 영어를 구사해서 신기했다. 서양인들이 중국인들 영어는 칭챙총 -_-; 이라고 놀리는게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단다. 나는 내 억양을 도저히 모르겠는데 영국,미국,한국 억양이 짬뽕된 이상한 억양인듯. 
 



 런던에도 인물화 갤러리가 있다.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에딘버러의 포트레이트 갤러리가 스코틀랜드 인물들을 다룬다면 이곳엔 당연히 잉글랜드 인물들을 다룬다.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는 갑옷을 입고 무장해있는 모습인데, 크롬웰이 강력한 독재자라 그렇게 표현된 줄 알았더니 그 당시 패션이었다. 그 유명한 튜더 왕가의 대표주자 헨리 8세와 여인들 그림도 있었는데 괜히 눈망울이 슬퍼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트라팔가 광장. 여기서 미미와 헤어졌다. 미미는 옥스포드로 떠났다. 왜 런던 구경을 이상한 루트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각자의 갈 길을 갔다. 트라팔가 광장이 상상 이상으로 커서 도저히 사진 한 폭에 담을 수가 없었다. 저 너머 보이는 건물은 내셔널 갤러리인데, 미술에 조예가 없는 관계로 스킵. 내일이 윌리엄 왕자 결혼식이라 방송국에서 생중계를 하고 있었고, 곳곳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있었다. 
 


 넬슨 기념비는 기절할 정도로 높은데, 사진은 올려다보고 찍어서 어떻게 보면 작아보인다. 하지만 무지막지하게 크다. 이순신 장군상정도겠거니 했는데 넬슨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크기가 파르테논 신전 기둥 하나 떼놓은 듯 했다.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치고 전사한 잉글랜드 구국의 영웅이다. 전쟁을 끝장 낸 아서 웨슬리보다 전쟁의 전환점을 만든 넬슨이 더 높게 평가받고 있는 듯 했다. 
 

 
 거대 방송국 세트. 어쩌면 나도 뉴스에 잠깐 나왔을지 모르겠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버킹검 궁전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유니언잭으로 뒤덮혀 있었다. 평소에는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추측으론 결혼식이라서 장식한 듯 했다.
 


 전세계에서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영국 연방 소속 국가 국민들로 많이 와 있었는데 스스로를 "정신나간 캐나다인"이라 지칭한 텐트로 없이 노숙하고 있는 캐나다인 일행이 인상깊었다. 밤에 추워서 어떻게 잤으려나. 호텔 가서 잤나;;
 


 곳곳에는 방송사들의 인터뷰 경쟁이 치열했다. 잠깐 구경해본 결과 인터뷰 내용은 "어떤 이유로 밖에서 이렇게 몇일 씩 기다리고 있나요?" 라는 질문에 "내일 결혼식은 아주 특별한 날이고 연합왕국의 역사와 전통이 어쩌고 저쩌고 god save the queen~" 뭐 이런 답변이 이어졌다. 나도 사진 찍었지만 저 인터뷰 하는 모습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주위에 우르르 몰려있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영국은 파리보다 더 정갈하고, 깨끗하고, 안정하고, 평화롭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유럽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무슬림 이민자들 숫자가 적어서 그런 듯 하다. 프랑스는 약 500만명의 무슬림 이민자, 영국은 약 10만명이다. 프랑스 파리를 가보면 느끼겠지만 대다수 이민자들이 사회 하류층을 담당하고 있고, 불법체류중인 경우도 매우 많아서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현재 유럽의 우경화도 이런 원인 때문이다. 
 무슬림을 비롯한 이민자 숫자 외에도, 런던은 녹지 비율이 기가 막히게 높다. 거의 모든 구획에 스퀘어 가든이 하나씩 있고 곳곳에 거대한 파크가 있다.. 자연이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다. 넓은 공원안에 있으면 여기가 유럽에서 가장 붐빈다는 대도시 런던인지 한적한 시골 어디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버킹검 궁전은 생각외로 초라했는데, 화려하지도 않고 거대하지도 않고, 뭔가 임팩트가 없어서 조금은 밍숭맹숭했다. 내일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이곳에는 이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있어서 도저히 저 앞 성문까지 갈 수가 없어서 겨우겨우 왼쪽으로 빠져나왔다. 
 


 좀 밍숭맹숭하다. 오히려 런던 구시가지가 더 화려해 보일정도.
 


 
 버킹검 궁전 옆에는 가드(근위대) 막사가 있는데 막사에선 끊임없이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행사라도 하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드릴 서전트가 동작이 굼뜬 병사에게 빽빽 고함을 지르는 소리였다. 

 막사 옆에는 가드 뮤지움(근위대 박물관)이 있는데 고전시대 근위대 창설 이후부터 현대까지 근위대의 모든 역사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출입료는 학생 2 파운드. 일반인은 모르겠다. 들어가는 길에 보이는 늙은 노병의 티셔츠 뒤 문구 "우리는 연합왕국 군인들과 그 미망인들을 지지한다." 근위대 전우회 뭐 이런 단체 소속이겠지.

 영화 7월 4일생이었나 디어헌터였나.. 청춘을 바친 후에 불구가 된 몸으로 돌아온 고국에서 비겁한 전쟁에서 싸웠단 이유로 손가락질 받는 주인공을 감싸며 "우리가 국채 판매를 하지 않으면 내 전우들과 전우들 가족들은 모두 굶어죽는다."며 분노를 숨기지 못하던 어느 상이군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박물관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모두 전사한 전우들의 가족들을 위해, 각종 기념사업 등을 위해 사용되는데, 유료 박물관치곤 매우 만족스러웠다. 처음 알게된 사실인데, 근위대는 그냥 빨간 옷 입고 왕궁만 지키던 부대가 아니라 16세기~17세기 창설당시에는 각종 전장을 누비는 전투부대였다. 자코바이트 반란,나폴레옹 전쟁,남아프리카 전쟁 등을 거쳐 이라크 전쟁까지, 전세계 전장을 모두 다 누빈 엘리트 부대였다. 또 하나 놀란 사실은 영국은 정말이지 전세계 모든 곳에서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전시관 끝에는 박물관에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방명록이 있는데 여러 여행자들의 편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당신들이 자랑스럽다." 와 같은 응원의 메시지가 대부분인데 8살 꼬마아이가 쓴 편지는 꽤 귀여웠다.
 나오는 길에 금발 여자애들 세명이 2파운드 입장료 소리를 듣고 경악을 하며 나갔는데 '니들이 돈내고 들어가봐야 볼 게 없단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애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다. 성당 내부는 결혼식 관계로 몇일전부터 문을 닫았고 주위는 엄청난 인파로 북적대고 있었다.
 


 도로 어느곳도 점거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ㅋㅋㅋ 이 사람 TV에서 생중계하는걸 봤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웨스트민스터 근처에 있는 빅밴. 


 가까이서 보면 그렇게 정교하고 화려할 수 가 없다. 다리 위에서 한참이나 빅밴과 런던 아이를 바라보았다.  
 


 런던 아이는 정말 몇년 되지 않은 신 랜드마크인데 한 번에 천 명이 넘는 인원이 탑승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돈이 없는 관계로 당연히 패스. 
 


 런던타워 브릿지를 보기 위해서 이동했는데 여기서부터 꼬였다. 방향을 반대방향으로 간 것이다. 이때부터 전혀 계획에 없던 현대 런던의 참모습 탐방 -_-; 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지하철 타고 가려고 반대방향으로 끝없이 갔다. 하지만 티켓 가격이 4파운드(7~8천원)이나 한다는 사실을 알곤 걸어가기로 결심. 이미 남쪽으로 엄청 내려와 있어서 숙소인 러셀스퀘어로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했다. 가는 길은 가는데만 집중하느라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그 많던 인파와 관광객들이 사라지고 실제 런던 시민들이 사는 공간에 들어서자 기분이 묘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아보였다. 재래 시장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주위의 빅토리아풍 건물들과 달리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 천막이 조금은 향수를 자극했다. 러셀 스퀘어로 가는길은 멀고도 험해서 헤매고 또 헤맸다. 

 저녁시간이라 런던 곳곳의 PUB에서는 즉석 파티가 열리고 있었는데, 시원한 맥주 한잔 들고 pub의 사람들과 유쾌하게 수다를 떠는 런던의 직장인들이 멋져보였다. 스웨덴에서 살면서도 느끼는거지만 서양사람들은 모르는 사람과 잠깐 이야기하고 헤어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듯 하다.
  


 뮤지컬 극장. 빌리 엘리엇은 영화로만 있는줄 알았는데 뮤지컬로도 상영되고 있었다. 돈이 없으니 역시 스킵!(계속 적으니까 왠지 슬프다.. 아아..) 가는 길에 테스코를 발견해서 허겁지겁 바게뜨를 샀다. 두개에 단돈 1파운드 할인행사! 오오오.. 교통비,숙박비를 빼고 돈을 거의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식비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스코틀랜드에서 기념품 산 탓에 돈이 많이 지출된 탓도 있고, 미미랑 한인 식당가서 피같은 만원을 날린 탓도 있고. ㅠ_ㅠ 
 그냥 먹으면 심심하니까 체다 슬라이스 치즈도 하나 샀다.  

 분명 유명한 명소인데 이름을 까먹어버린 곳.
 

 스코틀랜드도 그랬고 이곳에도 그렇고, 전쟁을 많이 치룬 나라답게 곳곳에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현대 런던의 최첨단(?)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옥스포드 서커스. 매우 길고 넓은 상업지구로 없는 가게가 없다. 쇼핑을 좋아한다면 절대 빼놓으면 안되는 곳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에딘버러 여행은 전혀 계획안하고 갔는데, 뭐 대충 내려보니 어딜 가야될지 보이는거 같아서 그랬다. 실제로, Wavely bridge 주위 The royal mile(로열 마일) 주위에 관광 명소가 몰려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로 스코틀랜드 왕국[각주:1] 시절의 왕,왕족들 그리고 수 많은 스코틀랜드의 유명 작가,과학자,예술가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있다. 참고로 영국의 모든 국립 박물관은 무료다. 입구에 기부금 받는 공간이 있을뿐. 참 좋은 곳이다. 아무튼, 내부는 고전시대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정말 고고하고 도도한 인테리어로 되어 있는데 유럽이나 엔틱 가구,인테리어에 환상이나 허영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오면 기절할듯..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나온다.

 실제 역사나 실화를 다룬 영화가, 배경지식이 있으면 더 재미있듯이[각주:2] 갤러리도 그렇다. 특히 이 초상화 갤러리의 경우 영국 정치사나 영국 유명 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가기전에 여행지에 대한 책 한 권 읽어보고 가는건 어떨까?

 스코틀랜드 역사는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게 그렇게 잉글랜드와 치고박고 싸웠다가 결국에는 스코틀랜드 왕이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하나가 되었는데, 이렇게 보면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한테 흡수당한 것이다. 근데 왕이 잉글랜드에 계속 머물고 왕국의 중심도 잉글랜드에서 돌아가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게도 왠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한테 흡수당한거 같은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_-; "이겼는데 왠지 진 기분이야.." 뭐 이런 느낌? ㅋㅋ

 초상화들 중 몇 점들은 정말 입벌어지게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해서 한참 떨어져서 봐야 전체를 볼 수 있을 정도인데, 하나같이 참 '고귀하다'는 느낌을 준다. 귀족,왕족들을 그렸기 때문에 당연한 거겠지만. 전혀 생각치도 못한 몇몇 인물들이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문을 나섰는데 이래서 사람들이 영국,영국 하나 싶었다. 

 
 에딘버러성으로 가는 길엔 온갖 기념품 가게와 신기한 가게들이 즐비했는데 스코틀랜드의 전통인 체크무늬 킬트 방직공장을 재현해놓은 거대한 지하 매장도 있다. 킬트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은 전통인데 19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만들어진 전통이다. 근데 저런 근대에 만들어진 전통을 세계화해서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을 끌여들이고 방직업의 중심지로 만든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나온다. 


 Flat cap, Irish cap, 우리나라에선 헌팅캡으로 불리는 위 사진 속의 모자 태생이 아일랜드,스코틀랜드인데 이 곳에서 오리지날 메이드 인 브리튼 플랫캡을 구입할 수 있다. 하아 촉감하며 디자인하며.. 가격은 최저 22~35파운드까지 천차만별. 기념품 가게들이 취급하는 품목은 거의 다 같은데 가격은 다 다르다. 대다수 가게는 25파운드에 파는데 나는 22파운드에 사는 가게를 찾아 구매했다. 3파운드면 거의 6천원 가량하는 엄청난 돈이다. 

 짐이 보따리 하나밖에 없었는데 플랫캡 쓰고 거울을 보니 갓 뉴욕으로 이민 온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같아 보였다. 그러니까 거지꼴 -_-; 이었다. 상의랑 하의는 21세기 디자인인데 모자만 19세기~20세기 초반에 머물러있으니 얼마나 웃긴지.

 


 기념품 가게에서 내 눈에 띈 윌리엄 월레스 모형. 옆엔 19세기 하이랜드 연대 군악대병 모형도 있었는데 오히려 진짜 스코틀랜드 역사라면 이쪽이 더 가까운거 같아 샀다. 비록 모양은 다분히 브레이브 하트의 멜 깁슨에서 따왔지만...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쓸 엽서도 몇 장 샀다. 교환학생와서 엽서값으로 몇만원 쓴듯; 한 번 보내는데 2000정도 든다. 엽서 가격 포함하면 3천원? ㅋㅋ 

 스코틀랜드 샵 이라는 이름의 기념품 가게의 웃긴 점은 주인이 중동 출신 무슬림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사회에 융화되기 앉고 터번(사용하기 편하게 모자형으로 아예 고정되어있더라 ㅋㅋㅋ 개량 터번 ㅋㅋㅋ)쓰고 있다..  얼마나 웃긴가.. 무슬림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것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전통입니다. ^_^" 이러는게 -_-;
  


 영국은 박물관 입장은 무료지만 성 입장은 유료다. 정말 별 볼일 없는 자그마한 성도 유료다. 이미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중세시대 성의 위엄을 느껴봤기 때문에 입구까지만 들어가진 더 가진 않았다. 빈곤한 여행자에게 저런건 사치. 
 


 에딘버러 로열 마일은 올드 타운이고, 웨이블리 다리 너머는 신시가지라서 현대식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아니.. 현대식은 아니고 19세기.. -_-; 누구 말마따나 유럽은 근대 이전에 시간이 멈춰있고, 미국은 근대에 시간이 멈춰있고, 한국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나..
 


 딱 여기까지. ㅋㅋ 그대로 뒤도 안돌아보고 나왔다. 
 



 저기 보이는 평평한 언덕(돌로 된 부분)은 Arthur's seat이라 불리는데 아더왕이 앉아있는 곳이라서 그런데 불린다나 뭐라나. 한 번 가고 싶었는데 하이랜드 고지대를 누비고 나니 다리가 부서질거 같아서 포기했다. 다리 문제도 있지만 이미 고지대에서 걸으면서, 기차타고 가면서 본 엄청난 풍경들을 넘치도록 봤기 때문에 저 정도 언덕은 별로 안땡겼다. 


 나오는길에 보니 해자가 있었다. 옛날에는 이 공간이 온갖 오물이 섞인 물로 가득차 있었겠지.. 해자가 있는 이 성을 뚫을 방법은 정문 공격밖에 없어보였다. 그나마도 다리를 올려버릴 수 있기 때문에 천연요새 아니었을까. 뒤쪽은 절벽이라 절벽을 타고 올라 올 수도 없고.



 성 근처엔 재미있는 상점들이 많다. 이 가게는 Camera Obscura 일루젼숍인데 착시현상을 이용한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가령 모나리자 그림을 왼쪽에서 보면 웃고있는데 오른쪽에서 보면 사탄 -_-;으로 변한다던가. 제일 인상깊었던건 3D 저스틴 비버 브로마이드 -_-;;
마의 16세를 맞이하여 역변의 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 최고 아이돌의 열기가 스코틀랜드까지 오다니.. 대단하다.  


 바로 옆에 있는 스카치 위스키숍. 직접 마실 수 있고 역사도 알 수 있고 쇼핑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료라서 GG. 딱히 술을 사랑하는 편이 아니라서 별로 안끌렸다. 
 


 관광할 때 발품팔아 다니는게 싫으면 투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영국에선 거의 모든 버스가 2층버스인데 관광버스의 경우는 저렇게 2층이 개방형이다. 에딘버러의 경우 모든 투어버스 집결지는 웨이브리 다리에 있고 10파운드? 17파운드? 정도 되는 금액을 내면 24시간 내내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버스 안에서는 가이드가 안내도 해준다. 나는 비루한 방랑자라 가격보고 그냥 포기했다. 
 


 유럽 건축의 특징은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있다는건데, 분명히 따로 지었는데 완전히 붙어있다. 그래서 Street, Block단위로 길 찾기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새 주소 체계도 이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건물 지어진게 강남처럼 계획된 개발구역이면 상관없지만 시골촌동네로 갈수록 그냥 '막지은' 곳들이 많아서 제대로 정착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나라나 미국 대도시같이 '현대적인' 곳들은 상업지구는 1층부터 꼭대기까지 100% 상업지구이지만 유럽은 1층만 상업지구고 그 위에는 주거 공간이다. 위 사진을 보면 1층만 상점이고 위에는 그냥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건물들은 대개 18세기나 19세기에 지어진 것들이 많고 구시가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내부 구조, 장 단점에 대해선 잉글랜드 여행할 때 확실히 알게 되었고, 잉글랜드 여행기에서 좀 더 적을 예정이다. 
 

 
 대성당? 교회?. 스테인드 글라스가 멋지다. 그런데 내부 사진 촬영하려면 포토 퍼밋으로 2파운드나 내야된다. 당연히 사진 안찍었다. -_-; 남들은 그냥 지나갔겠지만 나는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추모판(?)에 주목했다. 대영제국 시기 전 세계에서 목숨을 잃은 수 많은 하이랜드 병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있는데 영국이 치른 전쟁이 워낙 많다보니 판들이 많아서 어떻게 보면 교회 벽 전체가 좀 지저분하게 뒤덮혀있다는 느낌도 든다.
 


  에딘버러 구시가지 중 로열 마일은 현지인은 없고 관광객만 있다고 보면 되고, 구시가지의 그 외 지역에는 관광객 반, 현지인 반이다. 진짜 에딘버러를 보려면 신시가지로 나가야된다.
 


 웨이브리 브릿지인가 노스 브릿지인가 기억은 안나지만 로열 마일 방향을 향해 찍은 사진.
 


 에딘버러 성 말고 다른 성 하나가 더 있는데, 이름을 까먹었다. 근데 이 사진 그 성 사진이 맞긴 한가.. -_-;
 


 교차로에 있는 웰링턴 동상. 이 웰링턴이 내가 아는 웰링턴 공작이 맞는지 모르겠다. 웰링턴 공작 아서 웨슬리는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전쟁인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무너뜨린 인물이다. 이 공으로 웰링턴 공작 칭호를 얻으며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스코틀랜드의 상징, 킬트와 백파이프. 이곳에서 겪은 최고의 모순은 다름아닌, 이 백파이프 연주하는 할아버지가 별로 주목을 못받았다는 것이다. 관광지들이 힐끔 쳐다만 보고 그냥 지나친다. Scotland the brave 같은 연주곡은 유투브에서 찾아서 막 듣고 그러지 않나; 그런데 잉글랜드 런던에서 백파이프 연주하는 사람을 봤는데 사람들 완전 열광했다.  정작 진짜 스코틀랜드 사람이 스코틀랜드에서 연주하는 백파이프는 외면받고 잉글랜드에서 잉글랜드사람인지 웨일즈 사람인지 모를 이가 연주하는 연주는 환호받는다는게 좀 이상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정자세를 취해주셨다. ㅠ_ㅠ
 


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 미술에 조예가 깊은 편이 아니라 일부 관만 보고 나왔다. 미술은 가장 고귀한 쾌락중 하나라고 하는데, 난 그걸 이해할 만한 수준의 인간은 못되는거 같다.
 


 에딘버러성 뒤쪽에서 찍은 성. 참 자리 잘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한글 영애겠지? 하아.. 한국인들 민도 좀 보소 ㅡㅡ 쯧쯧. 
 여긴 진짜 현대 스코틀랜드가 아니야! 하면서 신시가지 탐험에 나서면서 결국 하이랜드에서와 마찬가지로 걷고 또 걷는 대장정 -_- 이 시작됐다. 그런데 정말 웃긴 장면을 봤다. 하이랜드에서 중국인 소리 들으면서 느낀거지만 확실히 이 곳 사람들의 자존감? 텃세같은게 센거 같았는데 한 에피소드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됐다. 인도 위로 어떤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걸 경찰이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Where are you from?" 하고 묻자 여자가 뭐라 대답했다. 그러자 경찰이 큰소리로 "England???? This is SCOTLAND!!!!!!!!!!!!!"하고 소리치는게 아닌가. ㅋㅋㅋ 그러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자전거는 여기로 다니지 않는다며 잉글랜드 놈들은 정말 이해가 안간다느니 하며 완전 무안을 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여자보고 주의하라면서 그냥 보냈는데 여자를 향해 FREEDOM!!![각주:3] 이라고 외치지 않은게 다행;;;

 신시가지는 관광지와 달리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노천 까페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했다.  한시간 정도 걷고나서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에 갔다. 사진 찍었는데 어디로 날아갔는지 안보인다..아무튼, 반드시 가봐야할 장소. 

 스코틀랜드의 선사시대 부터 현재까지 '모든것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인상깊었던건 역시나 중세시대. 스코틀랜드 전통검이 양손검 클레이모어를 봤는데, 정말 강인한 전사가 아니면 들고 서있기도 힘들정도로 거대했다. 정말 컸다. 진짜 컸다. 무지막지하게!!!!! 컸다. -_-;; 로버트 더 브루스나 윌리엄 월레스에 대해서 그리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었던 것도 좀 의외. 

 그 다음 인상깊었던건 다름아닌 스코틀랜드의 현대사다. 변화하는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의 전시관으로 현대 스코틀랜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곳곳에 영상물이 나오고 있어서 몇가지를 감상했다. 1970년대의 스코틀랜드 주거환경 개선사업영상를 감상했다. 70년대까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200년도 더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비좁고 비위생적이었다. 왜냐면 그 당시까지 아파트에 화장실과 샤워시설 등은 공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재개발사업에 착수해서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건데 홍보용 영상으로 당시에 제작된거다 보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들이 많았다. 새로 지어진 집에서 따뜻한 아침을 아내가 들고 등장하고 행복을 앞두고 자녀들과 맛있게 식사하는 가장의 모습.그리고 웃음꽃 만발!!ㅋㅋㅋ 으악 ㅋㅋ 오글오글 그 자체. 

 에딘버러에서 확실히 느낀건 에딘버러에 갔다고 스코틀랜드를 본게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스코틀랜드는 하이랜드, 고지대에 있다. 에딘버러 여행은 잘 짜여진 관광명소를 돌아다니는게 다였지만 하이랜드에서 봤던 아름다운 고지대 풍경과 내가 걸었던 수많은 숲길, 언덕들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공항가기 전에 기념품 가게 구경을 더 했는데 이미 모자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또 모자 구경을 하고 있엇다. 이것저것 써보고 나오려는데 중국여자애가 중국어로 모자를 들고 뭐라 묻는다 -_-; 젠장! 스코틀랜드 사람들만 아니라 중국애들까지 날 중국인 취급해 엉엉 ㅠ_ㅠ 내가 중국인 아니라니까 더 이상 질문을 안한다;; 중국인 아닌거 알았으면 그냥 영어로 물으면 되지 왜 안묻지;; 에딘버러에 중국인민박이라도 있나. 'ㅅ' =3

 공항가는 버스는 웨이브리 다리에서 100번버스인 AIR LINK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3.5파운드. 가는덴 30분. 10분간격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운영한다. 

 런던 히드로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정말 웃긴게 런던행 비행기가 5만원인데 기차가격은 10만원이 넘는다. 이상한 나라다.. 

 비행기 옆자리는 인도 청년이 앉았는데 이것저것 귀찮게 자꾸 말을 건다. 자기 할말만 계속하고 그래서 그냥 가는 내내 자는척 했다. 영화 '세 얼간이' 이야기하니 좋아하긴 하더라.. -_-; 인도는 안갔지만 방글라데시는 가봤다는 이야기하는 별로 안좋아했다. 파키스탄 사람이 아닌게 다행;;;[각주:4]

 런던 히드로에서 런더 페딩턴(Paddington??)역까지 가는 특급열차가 있고 페딩턴에 내려서 다른 지하철로 환승할 수 있는 런던 커넥션열차도 있는데 숙소인 러셀 스퀘어까지 가기 위해서 런던 커넥션 티켓을 샀다. 가격은 20파운드정도 한거 같다. 숙소는 대영박물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와이파이가 40분만 무료다. 속좁은 잉글랜드놈들! 스코틀랜드 최고! 헠헠;;
 
 Common room에서 멍때리고 있는데 동양인 여자애가 말을 건다. 이름은 미미. ㅋㅋ 봉미미도 아니고. 미미면 옛날에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여자애들용 인형이었는데. 미미쨔응이라니 ㅋㅋ 생긴게 대만사람처럼 생겼는데 의외로 캐나다 출신. 대만사람이라 생각한 이유는 얼굴이 중국인 얼굴인데 머리 스타일이 일본스타일이라서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이야기해보니 15살까지 대만에서 살았단다. 역시 그럼 그렇지.
 같은 동양인이라고 살갑게 말거는거 보니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도 했나싶었다;;나보고 몇번 방에서 자냐 묻길래 혼자 여행하나 싶어 물어보니 그렇단다. 그래서 런던 관광지 몇군데를 같이 가기로 결정! 호스텔에서 여행자들끼리 하는 이야기는 참 별거 없는거 같다. 달이 많이 기운 후에야 잠이 들었다. 잠자리는 불편했다. 침대가 내 키보다 작았다. 서양 사람들중에 키 180이 우습게 넘어가는 사람들이 즐비하고 2미터의 장신들도 많은데 왜 침대 크기가 이렇게 작은지 모르겠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자세로 쪼그려잤다. 그리고 그 다음날 잉글랜드 여행이 시작됐다.

  1. 스코틀랜드는 동군연합체제를 유지하다가 1707년 연합법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본문으로]
  2. 라기보다는 모르고 보면 그냥 지루하다는 생각만 가질듯. [본문으로]
  3.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멜 깁슨이 죽으면서 외친 유명한 대사. [본문으로]
  4.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과 독립전쟁을 벌여서 독립했다. [본문으로]
 영국도 당연히 솅겐 조약[각주:1]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코펜하겐에서부터 출국검사를 하는거 보니 아차 싶었다. 비행기를 타려고 할 때 티켓 끊어주는 직원이 나보고 비자가 있냐길래 그냥 스웨덴 거주허가증을 보여주니 통과시켜줬다. 에딘버러로 가는 내내 혹시 영국 방문하려면 따로 비자를 사전에 받아야되던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고 영국도 다른 여타 국가처럼 얼마간(아마도 90일?)은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었다. 에딘버러 공항은 꽤 소규모의 공항으로 그리 인상적인 모습이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스코틀랜드 영어 억양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왔지만 스코틀랜드 사람과 이야기해보는 적은 없었다. 스코틀랜드 억양은 종종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도 사용되는데, 다음 영상을 추천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5FFRoYhTJQQ) 엘리베이터 음성인식기가 스코틀랜드 영어를 못알아듣는다는 내용인데 많이 과장된거겠지만.. 막상 대화해보니.. 음.. 어쩌면 저 음성인식기 오류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흰머리 입국심사관이 이것저것 묻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영어로 이야기해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고. -_-;; 스코틀랜드 영어는 내 귀에 어떻게 들리냐면, 잉글랜드 영어 음성에서 중고음부 음역대를 다 깎아버려서 저음부만 남은, 웅엉웅엉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뭐 어찌어찌해서 일정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야기해줘서 통과를 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갈 때는 100번 Air Link 버스를 이용하는데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10분간격으로 버스가 있고 가격은 싱글 3.5파운드, 리턴 6파운드이다. 공항에서 타면 거의 모든 관광명소가 다 모여있는 The Royal Mile 바로 코앞 Wavely Station이 있는 Wavely Bridge에 내려준다. 시간은 30분정도 걸린다. 

 에딘버러에 대한 첫 인상은 "아 여긴 급이 다르구나..."였다. 웨이브리 다리에서 보이는 로열 마일의 웅장한 모습이란.. 일단 오늘의 에딘버러 방문은 내일 하이랜드로 가기 위한 경유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냥 바로 숙소로 갔다. 

 숙소 리셉션 여직원은 양 눈썹에 송곳 비슷한 피어싱을 한 고스족[각주:2]으로 사뭇 악마의 뿔이 생각나기도 했다. 호스텔은 굉장히 소규모로 아늑했는데, 단점은 주방이 좀 작았다. 취사공간도 한곳 밖에 없어서 한참 기다려야되고. 

 주방에는 중국인 여자애들 세명이 중국인 종특인 소란스럽게 떠들기 스킬을 시전해서 왁자지껄했다. 한국에 있는 중국인 유학생들도 그렇고, 일본에서, 유럽 곳곳에서, 스웨덴 학교에서 본 중국인들도 하나같이 소란스럽게 떠드는데, 중국어 자체가 성량이 크지 않으면 대화하기 힘든 언어인가 싶가? 하는 의문도 들고 소리 크게 내어 이야기하는거 자체가 하나의 문화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뭐.. 중국사람은 이런 특성때문에 어딜가나 50m 떨어져있어도 한 번에 중국인이라는걸 알 수 있는거 같다. 뭐ㅋ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이 다 그런건 아니다. 내가 아는 중국애들 몇몇은 정말 말도 잘 안하는 성격이니까.

 방에 가니 캐나다에서 온 커플이 있어 이야기를 좀 하게 됐는데 유럽배낭여행중인데 그냥 도시만 정하고 세부일정은 없이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에딘버러에서도 뭘 해야될지 모르겠단다. 바닷가 이야기가 나와서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이야기를 하면서 열심히 수다를 떨었는데 알고보니 옆쪽 침대에 있던 또 다른 커플이 프랑스인이었다. 또 한바탕 이것저것 이야기 하나보니 밤이 깊어 잘 시간. 그런데 폰 충전을 하려고 보니 영국은 플러그 모양이 다르다.. 내가 가본 유럽 국가들 모두 우리나라랑 똑같은 전압을 쓰길래 영국도 그러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정말 특이한 3구짜리를 쓰는데 어댑터를 어디서 사야될지 고민이 됐다.

다행히 캐나다애들이 어댑터를 가지고 있어서 그 날밤은 무사히 넘겼는데 그 다음날 인버네스에서는 고생을 좀 하게 됐다. 

 다음 날 아침에 인버네스로 가는 기차표를 끊는데 왕복 티켓이 57파운드.. 우리 돈으로 10만원은 한다. 기차로 3~4시간 가량 가는 거리인데 KTX처럼 빠른것도 아니면서. 유럽에 살면서,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거지만 우리나라 교통운임을 정말 싸다. 유럽은 버스비,지하철비가 죄다 5천원,만원 이런식이고 기차값도 5,6만원씩 하니 기절할 지경.


 인버네스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수도로 지도상의 'A'지점에 있다. 에딘버러와도 엄청난 거리에 떨어져있고, 런던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다. 정말 영국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다.


 하이랜드에 온 이유는 하이킹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딱히 경로 계획같은게 없었다.그래서 그냥 언덕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고 나중에 확인해본 나의 여정은 위 지도와 같다. 참고로 굳이치는 산들과 고지대를 보려면 더 북쪽에 있는 isle of skye를 가야되는데 접근성이 너무 안좋고, 투어를 이용하기엔 돈이 없어서 포기했다. 돈에 여유가 있다면 현지 투어를 이용하는게 좋을듯? 나는 인버네스에서만 머물렀지만 기차타고 가는 4시간 가까이 입 벌어지는 풍경들을 계속 봤기 때문에 만족한다. 
 


 인버네스의 상징적인 이 다리는 굉장히 독특한 다리다. 왜 독특하냐면 걸을 때 다리가 흔들린다. -_-; 분명히 튼튼한 철골구조로 보이는데 흔들린다. 어떤 느낌이냐면 출렁다리를 건너는데 그걸 양쪽 끝에서 엄청난 힘이 억지로 꽉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 그래서 움직일때마다 다리가 흔들거리려고 하는데 어떠한 힘에 의해서 저지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눈꽃송이 모양의 장식. 건너편에 보이는건 인버네스 대성당(아마도).
 


 길거리는 뭐 대충, 이렇게 생겼다. 고층 건물도 없고 정말 조용한 동네이다. 인버네스엔 성이 있는데 성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아서 성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하고 올라가보진 않았다. 
 


 중간쯤 올라와서 바라본 인버네스. 외곽엔 B&B로 가득차있다. B&B란 Bed & Breakfast로 영국에서 흔한 숙박업소 형태다. 일종의 민박이라고 보면 되고 주차공간도 제공하고 ensuite room이므로 가족단위로 온 관광객들이 이용한다.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즐기고 싶어 다가가니 이미 닭둘기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옷(깃털)까지 훌훌 벗어던지고 배를 보이며 자고 있었다.. 아니 죽어있었다... -_-;
 


 몇시간을 걸었다. 경로를 정하고 간게 아니라 길이 없는 곳에 갔다가 다시 되돌아나오길 여러차례.. 언덕을 가고 싶은데 도저히 언덕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안보였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났다. 저 사진의 하얀 상자(utility box일까?) 에 앉아있던 노인은 지나가는 나를 불러세웠다. 노인은 영어인지 게일어인지 알 수 없는 극악의 억양과 발음으로 뭐라 주절주절하는데 나에게 "~~~를 찾고 있는가."라고 묻더니 대답도 안들어보고 혼자 어쩌고 저쩌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는 ~~마일 밖에 떨어져있네." 하면서 지금 가는길로 가지 말고 오른쪽 옆길로 가란다. 정말 하나도 못알아들어서 그냥 알아듣는척 하고 가던 길 가려했더니 이 길이 아니라 옆길이란다;; 어쩔 수 반 강제로 옆길로 가게되었다.
 

 아무리 봐도 집만 몇채 있고 그 너머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노인의 성화에 못이겨 계속 가보기로 했다. 
 


 숲길이 계속 이어지다가 갈림길이 나왔는데 하나는 더 위로 가는거고 하나는 내려가는 길이었다. 위로 가는 길을 보니 출입통제 마크가 붙어있고 폐가까지 있어서 갈 엄두가 안나 내려가려 했는데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노인에게 안들키고 내려갈 생각을 궁리하다가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이 먼거리에서 날 찾은거지;; 

 그때 노인 앞으로 버스가 한대 지나쳤다.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노인은 없었다.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그 노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범상치 않았던 노인의 미소가 떠오른다.
...은 사실 버스타고 집에 감;;; 가서 축구봤을듯;;;

 아무튼, 노인의 매의 눈빛으로 내려가는 길을 저지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입금지 구역을 뚫고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끝없은 언덕을 넘고 넘었다. 노인이 뭘 알려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찾던 전망 좋은 언덕임은 확실했다. 마지막에는 온 힘을 향해 달렸는데 그 끝에는 아래와 같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나무의자. 앉아서 인버네스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왼쪽 사진이고 오른쪽으로 한참이나 풍경이 더 이어지는데, 참 평화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앞에 보이는 바다는 다름아닌 북해다. 이 마을 가운데 흐르는 강은 그 유명한 네스호의 일부인데 네스호는 내가 마을을 내려다보고있는 이 언덕 바로 뒤에 펼쳐져있다. 네시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려졌는데, 어릴적에 책에서 봤을 때는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그때는 세상이 온갖 신기하고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먹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생기다보니 한편으론 우습고, 한편으론 아쉬웠다. 진짜였으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네스호는 인버네스에서 버스타면 정말 금방 갈 수 있는데 가진 않았다. 어차피 난 이미 네스호의 일부를 보고 있고, 네스호가도 봉제인형 하나 띄워두고 "이게 네시란다." 라고 할거 같아서 혼자 킥킥 웃기만 했다.
 


  바로뒤에는 검은 숲이 있었는데 얼마나 오싹한지, 숲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오는 듯 했다. 한 번 들어가볼가 했는데 주위에 출입을 막기 위해 쳐져있는 펜스들도 있고, 들어갔다가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포기했다. 앞에는 평화로움이, 뒤에는 으스스함이 있다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몇 번이고 느끼는거지만 나는 자연이 좋다. 프랑스 여행을 갔을 때도 파리를 버리고 노르망디로 간 이유도 파리의 도시적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봄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다시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 가운데에는 이처럼 폐가도 있었는데, 우리나라 폐가는 그냥 말그대로 버리고 가버려서 탈선의 장소로 이용된다던가, 범죄의 온상 등이 되고 흉물스럽게 방치되어있는 반면에 이 곳 폐가는 저렇게 철저하게 모든 문, 창문을 봉쇄해놔서 그런 것들을 사전에 방지해놨다. 



 인버네스에서는 외지인, 특히 유색인종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내가 갔던 방글라데시나 우리나라의 불과 10여년 전 모습처럼 외국인이 지나가면 "우워워워어 외국인이다!!"하며 오도방정을 떤다던가, 신기하게 쳐다본다던가 하는건 없지만 그대로 한 번씩은 쳐다본다.

 인버네스에서 나는 영어 못하는 중국인이 되었는데 스코틀랜드 하이랜더들의 반응은 사뭇 웃기면서도 황당했다. 하이킹을 하면서 주택가를 지나갔는데 차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 안에는 할머니 한 분이 타고 있었는데 내가 지나갈 때 차 문을 급히 잠구는 것이 아닌가. 척! 하는 소리에 "저는 중국인 갱이 아닌데요;;" 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고. 좀 그랬다.

 
 하이킹 끝나고 돌아올 때 이미 6시가 넘어서 마트가 문을 닫아서 도미노 피자를 갔다. 도미노 피자에서도 알바의 말을 못알아들어서 정말 고생했다. 도대체 이게 정말 영어가 맞긴 한가. -_-; 도미노에서는 한판 사면 한판을 더 주는 1+1 행사를 하고 있길래 텍사스 bbq피자를 시켜서 룰루랄라 호스텔로 들고왔다. 그리고 열어주니 짜잔!! 젠장!! 누가 씬피자 달랬어..
 ㅠ_ㅠ 이건 도우가 하나도 없고 그냥 토핑만 있는 수준이었다.

 심슨가족 어느 에피소드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윌리가 시모어 교장의 계략에 속아넘어가서 이용당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You used me!" 하면서 울부짖는다. 이 장면이 생각해서 혼자 계속 킥킥댔다. 스코티쉬 놈들이 날 이용했어.. 흑ㅎ그..

 피자 나오길 기다리는데 10대 남자애 두명이 와 주문을 하고나서 날 보더니 둘이서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네 학교에 중국인이 있는데 걔가 뭔가 사고를 쳐서 애들한테 두들겨 맞았다느니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_-;

 피자가게 오기전 언덕 주택가에서는 한 가족이 놀고있었는데 꼬마가 날 보더니 'chink'(중국인 비하하는 말. 우리나라말로 번역하는 짱개정도?) 가 지나간다고 소리쳤다. 애 부모가 날 힐끗 바라보는데 뭔 생각을 했을까. 나중에 중국어 배워서 진짜 중국인인척 해야겠다.. 짱개라고 놀려대면 "아편 전쟁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이 빌어먹을놈들!"하면서 마구마구 때려주던가 해야겠다. ㅠ_ㅠ 

 호스텔에 도착하니 피로가 밀려왔다. 족히 6시간은 넘게 걸었다. 호스텔 직원은 스코틀랜드 억양.. 아니 발음의 절정을 보여줬는데 보증금 문제로 이것저것 이야기하니 나보고 "와워자나임?"이라 묻는다. 나임? 나인? 보증금이 10 파운드기 때문에 보증금 9파운드 맡겼냐는 질문인줄 알았고 10 파운드라 하니 다시 되묻는다. 생각해보니 나임이 아니라 name이었다.. -_-; What was your name? 나임과 네임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발음. 

 그 날 밤엔 파티가 있었다. 덴마크산 칼츠버그 맥주가 페트병으로 제공되는 평범한 파티였는데 스코티쉬랑 스코틀랜드 영어 이야기를 했더니 나보고, 잉글랜드 사람들도 못알아듣는 경우가 많다고, 내가 영어를 못하는게 아니라고 조언해줬다. 스코틀랜드 영어는 게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종종 단어도 다르게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아일랜드 사람들 발음은 더 이상한데, 발음만 이상한게 아니라 사람들 자체도 이상하다고 귀띔해주길래 한 때 아일랜드 역사에 빠져있었던 내겐 그냥 헛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이건 런던에서 일부 사실로 증명되었다.. -_-;
  
 잠자리에 들 때 문득 꽤 많은 '젊은' 한국 여행객들이, 호스텔이 아닌 한인 민박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좀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차피 여행을 어떻게 하는지는 그들만의 문제라서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견문을 넓힌다는 견지에서 보면 한인 민박은.. 글쎄다. 그 나라를 알려면 그 나라 사람들과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부딪히고 소통해봐야되는거 아닐까. 뭐 그냥 가서 사진만 냅다찍고 "나 영국 갔다옴ㅋㅋㅋㅋㅋㅋ" 이러는게 목적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그냥 그렇다.

 술기운 덕분에 늦잠 잘 줄 알았는데 왠걸, 새벽 5시에 깼다. 3시간도 못잤다. 하지만 첫 기차타고 에딘버러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길을 나섰다. 새벽 6시 47분. 인버에스에서 에딘버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1. 유럽 국가들이 맺은 국경 최소화 조약. 다른 나라로 넘어갈 때 출입국 검사를 안하는 이유가 이 조약때문이다. [본문으로]
  2. 고트족이 아니라 고스족.. 고스로리가 아니라 그냥 고스족이다.. -_-; [본문으로]


 아침엔 아기 울음소리로 깼다. 분명히 어느 방에선가 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아침식사를 하고 체크아웃을 하려는 순간까지도 울음소리가 들려서, 너무나 이상해서 한 번 그 소리를 따라가보니 2층의 다른 객실이었다. 이곳에선 게임 히트맨에서나 보던 열쇠구멍[각주:1]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열쇠구멍 사이로 보니 나이가 40대는 넘어보이는 여성이 침대위에서 자고있고 그 위에 아기가 올라타 울고 있었다. 어떻게 아이가 저렇게 우는데 잠에서 안깨어날 수 있지? 주인 부부 내외도 분명히 그 소리를 듣고 있을텐데 별다른 언급이 없다. 오옷.. 이것이 바로 이 마을의 숨겨진 비밀~ 뭐 이런건가. ㅎ_ㅎ 는 망상이고..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어제 밤에 도착한 프랑스에서 뭔가를 -_-;[각주:2] 공부하는 양키 커플 한쌍이랑 같이 주인 아저씨 차 타고 몽생미셸로 떠나기로 예정 되어있었는데 잠깐 짬을 내서 동네 구경을 나갔다.
 


 유럽에 여행다니면서, 스웨덴에 살면서 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덕에 심즈에서 집짓는 기술도 늘었다. -_-; 아무튼, 석조건물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좀 멀리 나가려던 차에 아저씨가 날 부른다. 늦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차를 타고 어제 밤 자전거를 타고 갔던 길을 순식간에 쌩쌩간다. 확실히 불빛하나 없는 밤의 노르망디 라이딩은 위험한 짓이었다.
 


 아침의 몽생미셸은 또다른 느낌으로,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이 아직 그리 많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어가던 즈음에, 그 커플과는 각 길을 갔는데 멀리서 아침에 들었던 정체 모를 아기 울음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같이 이야기 좀 해볼껄 그랬다. 
 


 수도원은 꼭대기에 있고, 입장료가 학생기준 5.5유로다. 몽생미셸을 굳이 세 부분으로 나눠본다면, 공성전용으로 구축한 외성과 성벽들, 주거지역[각주:3] , 그리고 수도원이다. 수도원은 이리저리 미로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고 관광객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통로를 밧줄이나, 문을 닫는 식으로 출입을 막아놔서 일방통행으로 만들어놨다. 이 곳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썩 아름답진 않지만 가장 처음 보게되는 예배당엔 실제로 사제들과 수녀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경건함이 외적인 면을 보완해 주었다.
 


 기념품 가게는 엽서부터 몽생미셸 모형까지 팔고 있는데, 특이하게 노르망디 해변이다보니 범선 모형도 판다. 흔히 알고 있는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던 대항해시대[각주:4] 때 사용되던 카락이나 갤리온 모형을 파는데 수집욕을 억누르느라 고생했다. 중세시대 유적답게 십자군 피규어도 팔고 있는데 정교한 것은 사이즈도 크고 정말 사실적이었다. 
 
 심지어 여기선 중세시대 검도 팔고 있는데, 검까지는 괜찮다. 여기선 총도 판다. 물론 가짜 총이겠지만 퀄리티가 대단하다. 그런데 18,19세기 드라군 기병용 권총[각주:5]까진 이해해도 20세기 너머의 M1 개런드[각주:6]나 MP44[각주:7], M1911 콜트 권총까지 파는건 좀 황당했다. 가격이 괜찮아서 한 번 살까 했는데, 이 총을 들고 공항에 가서 보안검색을 통과할 때 일어날 일을 생각해보니 암담해졌다. -_-; "몸에 벨트나 휴대폰같은거 있으면 꺼내주세요." 라는데 
"잠시만요.. 총이 있어서요." 하면서 주머니에서 총을 스윽 꺼낸다고 생각해보라.. 검문 검색이 심한 미국에선 그 자리에서 사살당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도검이나 총은 그림의 떡이었고 접시에 몽생미셸을 그린 공예품과 십자군 기사 피규어를 하나 샀다. 홉스봄[각주:8]의 책을 읽은 그 이후부터 현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전통들[각주:9]을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에펠탑은 확실히 최근[각주:10]에 만들어진 것인데 19세기 후반에 에 관광지화가 시작된 몽생미셸에 저런 현대식 무기들이 팔리는걸 보니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알고보니 현재의 몽생미셸 모습은 20세기에 또 다시 다듬어진 것이라 한다. 최초의 9세기 몽생미셸은 아무것도 없는 바위섬에 허름한 수도원 하나 뿐이었다. 그런 점에선 몽생미셸도 '만들어진 전통'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여긴 일본인이 정말 많이 오는데, 점심 쯤 다 둘러보고 나가려고 밖에 나오니 정말 끝이 안보이는 관광버스에서 엄청난 수의 일본인들이 내렸다. 끝없는 일본인들의 행렬은 노부부들 깃발투어[각주:11]가 아니라 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구성도 다양했다. 

 의외로 한국 사람은 나 빼고 단 사람도 없었다. 중국인은 서너 명 무리가 있었는데. 요즘 우리나라 유럽여행 풍토가 남들이 따라간 코스 그대로 다라가는게 태반이라, 나같이 파리를 버려버리고 다른 지방으로 가는 여행에서 한국인 만나는게 어려운 일인건 당연한 듯 하면서도, 몽생미셸을 방문하는 사람이 적은건 아닌데, 단 한 명도 없는건 좀 의아했다.

 몽생미셸에선 종교적 경건함에서 오는 숙연함이나 그런건 없었다. 단지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간듯한 기분에 넋놓고 하염없이 건물 구석구석을 살펴봤을 뿐. 

 몽생미셸에서 오믈렛이 처음 탄생했다고 하는데[각주:12] 여기 오믈렛 가격은 한화로 5만원이 넘는다. 아니, 오믈렛만 그런데 아니라 싸구려 콘 아이스크림조차 5천원 가까이 한다. 우리나라에선 외국인 상대로 어떻게든 사기쳐서 돈 많이 뜯어내려고 내국인/외국인에 다른 가격을 제시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각주:13], 여기선 그런거 없이 당당하게 말도 안되는 가격을 메뉴판에 걸어놓는다. 아 이 당당함. 나는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그 가격에 굴복하고 3유로짜리 싸구려 바게뜨 빵을 사먹었다. 구석에서 우적우적 먹고 있는데 나보고 마실게 필요하냐고 묻는다. 내가 Is it free? 라니까 아니라고 "젠장! 이 자식 눈치 좀 보소 ㅡㅡ"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다. 내가 콜라 마시고 나면 "먹었으니 돈 내! 공짜라곤 하지 않앗어." 라고 했으려나.

 돌아갈 즈음 되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가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손님이 없는 한적한 가게엔 직원들끼리 열심히 수다를 떤다. 엽서 하나를 사는데 옆 사람과 수다떨면서 그냥 가격표를 재빨리 찍고 돈 받고 대충 인사하고 날 보낸다. 뭐, 이 유명 관광지도 사람 사는건 다 비슷하구나. 아침에 일어나서 장사하고 저녁되면 문닫고 집에 가고.

 입구에 엄마가 사준 갤리온 모형을 꺼내들고 아주 흡족한 모습을 짓고 있는 4살정도로 보이는 꼬마애를 봤는데, 정말 그렇게 행복한 표정은 처음 봤다. 이 꼬마에게 지금 이 순간은, 몽생미셸의 경건함도, 십자군 시대의 어두움도, 리비아 사태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는 듯  했다. 오직, 엄마가 사준 이 갤리온 배가 세상의 전부인양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렌으로 가는 익스프레스 버스가 있다고 들었는데 배차 시간이 너무 늦어서[각주:14] 퐁토르송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퐁토르송에선 캉(Caen)을 거쳐 파리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TGV가 아니라서 시간도 5시간이 넘게 걸리고 가격도 40유로 정도 했다. TGV를 안타는 대가로 25유로를 절약하다니. 꽤 괜찮은 거래였다.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봄의 낭만적인 노르망디는 정말 아름다웠는데 한가로이 풀을 뜯는 젖소들과 드넓은 평원을 보자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같은 자리 앉은 프랑스 꼬마애가 인형가지고 난리치느라 바쁜 와중에 나는 그 여러 시간동안 창문 밖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기차는 생 로(St Lo)와 캉(Caen)외 10곳도 더 되는 역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다. 앞의 두 도시는 참 익숙해서[각주:15] 감회가 새로웠다.

 다시 도착한 파리는 여전히 침침하고 우울한 분위기였는데, 다시 알로하 호스텔로 갔다. 호스텔은 더욱더 칙칙해져서 파리 관광할 마음도 안들고, 룸메이트와 잡담할 생각도 없어져서 로비에서 밤이 깊을 때까지 인터넷만 했다. 그 다음날 다시 지하철과 RER B를 타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는 짐 하나가 목록에 없는 것이 더 올라와있어서 보안 검색을 하느라 30분 넘게 이륙이 지연되었는데, 저가 항공사의 단점이 이런건가 싶었다.[각주:16] 덴마크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 문을 들어서는 그 수간부터 시간을 재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스웨덴 내 집 안에 발을 들여놓기까지 딱 1시간 5분 가량이 걸렸다. 외레순 다리 접근성의 위엄에 감탄하며 나의 프랑스 여행을 그렇게 막을 내렸다. 


  1. 히트맨에선 방문 너머를 살펴보기 위해 열쇠구멍을 이용한다. [본문으로]
  2. 음향악?? 철학? 미학? 기억이 안난다. [본문으로]
  3. 지금은 기념품 가게, 레스토랑뿐이다. [본문으로]
  4. 15세기~16세기 [본문으로]
  5. 사실 드라군 권총도 여기에 있기엔 좀 이상하다. 대혁명 이후 관광지로 개방되기 전까진 정치범 수용소로 쓰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2차대전 미군 제식용 소총. [본문으로]
  7. 2차대전 시기 독일군이 사용하던 기관단총. [본문으로]
  8. 영국의 사학자. OO의 시대 시리즈로 유명하다. 자본의시대 혁명의시대 뭐 이런거; [본문으로]
  9. 홉스봄의 저서 <만들어진 전통> [본문으로]
  10. 나에게 19세기는 최근이다. [본문으로]
  11. 길 안잃으려고 선두가 들고있는 깃발만 보고 졸졸 따라가다가 결국엔 여행가서 남는 기억이 깃발밖에 없는 여행 [본문으로]
  12. 나도 다른 블로그에서 본거라 사실인지는 모른다. [본문으로]
  13. 택시비 사기치는 것도 있고. [본문으로]
  14. 4시 30분이었던가? 나는 점심쯤에 자리를 떴다. [본문으로]
  15. 2차대전 관련 게임으로 8년전에 미리 접했다. ㅋㅋㅋ [본문으로]
  16. 덴마크에서 파리로 오는 비행기도 10분정도 늦게 이륙했다. [본문으로]
 


 생 말로는 브르타뉴 지방에 속한 도시로, 파리에서 TGV로 3시간이 넘게 걸리는 매우 멀리 있는 도시다. 브르타뉴는 프랑스 북서쪽 에 있고 그 옆은 노르망디이고 북쪽으로는 영국의 본머스가 있다. 생 말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적들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았는데, 17세기에는 유럽 각국의 샤락 정책[각주:1]에 따라 해적들의 활동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해적 활동은 19세기무렵부터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 지금은 유럽에서 인기있는 휴양지 중 하나[각주:2]가 되었고 크레페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여행을 가면 길 잃기 싫어서 되도록이면 걸어다니는데, 생 말로 역에서 생 말로까지 한참을 걸었다. 도착할 쯤 되니 파리에서 엄청나게 걸었던 것 때문에 다리가 너무 아파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성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 그런 피로는 싹 풀렸다.
 


 파리가 쓰레기와 오물, 부랑자들이 넘치는 음침한 곳이라면 브르타뉴 생 말로는 그야말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였다. 모든 건축물이 옛 방식 그대로 서유럽의 석조양식을 가지고 있고, 거리 어디에도 아스팔트 도로가 없는 그야말로 옛 유럽의 모습이었다. 
 


 계절도 매우 따뜻한 봄이라서 노천카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넘쳐났는데, 평소 까페 이용을 거의 하지 않는 나도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은 충동을 들만큼 거리는 낭만적인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샤락 해적들이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며 피식 웃던 차에 곳곳에 벤치가 마련되어 있는 미니 정원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흔히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하면 당연히 망설임 없이 빅토르 위고와 프랑수아르네 샤토브리앙을 떠올릴 것이다. 이 중 샤토브리앙이 바로 이 생 말로 출신이다. 빅토르 위고는 내 다음 목적지인 몽생미셸의 관광지화에 일조화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샤토브리앙 작품을 읽으면 프랑스보다는 이탈리아를 가고 싶어지니 그의 고향과, 현재의 위상 등을 생각해보면 좀 아이러니 하다.
 


 생 말로는 크레페로 유명한데, 왜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일본 도쿄 여행을 갔을 때 크레페라는 음식을 처음 접해본 결과 그 흐물흐물한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때문에 콘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사진은 이미 절반정도 파먹은 것이다. 베스킨라빈스에 왜 저 맛이 없을까 아쉬움이 들면서, 만약 저 레시피를 알아내서 학교 근처에서 장사하면서 분명 전국적으로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각종 레지옹 깃발들이 걸려있다. 생 말로나 몽생미셸의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고 느낀건데, 저 사진에 나와있는 것처럼 퀘백을 참 많이 아낀다. 
 


성벽 위로 올라가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켈트 해가 너무 아름다워서 파리를 버리고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암초위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황금빛 해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스페인 말라가 쪽을 La costa del sol이라 하여 '태양의 해변'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도 무언가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전망대에도 30분 넘게 그냥 가만히 있었다. 홀로 여행하는 즐거움은 여행 중의 사색과 자유로움에서 온다. 깃발보고 가이드 졸졸 따라다니느라 바쁜 단체 관광객들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이런 여행이 더 취향에 맞는다. 



 중학교 때 활동하던 동호회의 30대 회원 홈페이지에는 유럽 각국을 혼자 돌아다니며 쓴 여행기가 있었는데, 어릴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막연히 나도 나중에 저렇게 혼자 여행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해냈다.  게임 대항해시대 하면서 아일랜드 더블린이 어디있는지 몰라 지구본을 돌려가며 찾던 시절이 어제같은데.

 생 말로에서 퐁토르송으로 가는 버스는 4시 30분에 있었다.[각주:3] 퐁토르송 역에 내려 숙소 주인 아저씨의 픽업을 받아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퐁토르송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시골에  있는 전통적인 석조 가옥으로, 영국인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프랑스에 영국인이 살고있는건 그리 낯선건 아니지만, 처음엔 당연히 프랑스인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저녁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몽생미셸의 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해는 지고 있어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주인 아주머니께 자전거 좀 빌릴 수 있냐해서 자전거를 빌려 길을 나섰다. 자전거로 몽생미셸을 방문하는 사람은 여럿 있었기 때문에 친절하게 쓰여진 길 안내 프린트 종이도 받을 수 있었는데, 밤에 가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각주:4]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 했다. 

 


 숙소에서 몽생미셸까진 자전거를 타고 1시간 -_-;이 걸린다. 엄청난 거리다. 나는 홀로 자전거를 타고 노르망디를 달렸다. 정말 주위에 아무 것도 없었다. 혼자서 소리를 질러도,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가운데에 브레꾸르 마뇨르[각주:5]를 연상케 하는 대 저택도 있었는데, 그 모습에 반해서 잠시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에 개가 컹컹 짖고 주인이 거기 누구냐며 소리를 질렀는데 이것이 진정한 유럽 농촌의 분위기구나 하며 감탄했다. 우리나라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스웨덴은 자전거 앞뒤로 야간 라이딩 시 반드시 라이트를 달아야 한다. 프랑스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다행히 빌린 자전거엔 라이트가 달려있어서 아주 간간히 만나는 차에 치이진 않았다.

한참을 가다보니 저 멀리 아주 조그맣게 몽생미셸이 보였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노르망디 평야 가운데에 홀로 서서 바라보는 몽생미셸의 불빛이란. 에밀리오 알바레스가 이런 느낌을 받았겠구나 싶었다. 


 자전거를 미친듯이 밟아 다가갔다. 최초로 보고서 실제로 가까이 가기까진 30분가량이 더 걸렸다. 몽생미셸이 매우 가까이 왔을 때 수많은 관광객들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나를 미친놈 쳐다보듯 했다. 하긴, 불 하나 없는 밤에 자전거타고 여길 오는건 정신나간 짓이긴 하다.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매우 많았는데 하나같이 빛에 반사되는 형광색 재킷을 걸치고 조심조심 밤길을 걷고 있었다. 다음날 확실히 알게된건데 일본인이 정말 많이 온다. 전체 관광객의 20~30%는 되보였다. 정말 많다. 정말. 일본인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일본인인척 "스게! 스게!"거리고 "스미마셍~ 헨나 바이꾸가 아리마쓰~" 이랬는데 "하이" 이런 대답을 들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불빛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별을 보았다. 정말 별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오리온의 벨트 밑 오리온 대성운 부분의 작은 별들도 보였다. 95년에 책으로만 보던 별자리를 처음으로 봤을 때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하교길에 친구들과 별을 보았다. 날씨가 맑다는 것의 기준은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맨눈으로 볼 수 있냐 없냐로 스스로 정했는데, 노르망디의 밤하늘엔 성단뿐만 아니라 은하 그 자체가 펼쳐져 있었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전거를 세우고 한참이나 밤 하늘을 바라봤다. 베텔기우스가 곧 폭발해서 사라질거라는 뉴스를 본거 같은데, 팔 하나 잘린 오리온은 좀 웃길거 같다.
 
 몽생미셸은 성 오베르가 9세기 대천사 미카엘의 계시를 받아 건설한 수도원으로, 백년전쟁때는 수도원이 아니라 요새로써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18세기 대혁명을 거치면서 성직자계급이 모두 '박살'남에 따라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반혁명분자들을 수용하는 교도소가 되었다. 그래도 알카트레즈 수준은 아니었는지 19세기 빅토르 위고르를 위시로 한 낭만주의 작가들의 찬사를 통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를 낭만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동화속 모습이라면 정말 '관광지'인 이 곳 몽생미셸이 그런 환상을 실현해주는데 더 알맞다. 몽생미셸 수도원 주위 건물들은 모두 기념품가게와 고급레스토랑인데 레스토랑 음식 가격이 한화로 4만원,5만원정도 하니 가난한 여행객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그 나라의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노르망디가 참 마음에 들었다. 숙소로 돌아온 뒤 휴식을 취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것이다보니 방 위치가 아주 이상적으로, 내 방은 제일 고층이었다. 유럽 가옥들은 지붕이 삼각형이다보니 침대 부분 천장이 삼각형으로 관입되어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프랑스에서 별로 살고 싶지는 않은데, '여행지'로는 참 좋은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전에 얼마전 인터넷에서 본 프랑스의 리비아 사태 개입 관련 기사의 리플 하나가 떠올랐다. "병인년에 조선인을 학살한 것도 불란서 놈이요. 병인년에 조선일의 문화재를 침탈한 것도 불란서 놈이요. ~~~" 로 이어지는 리플이었는데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 리플 작성자는 19세기에서 타임머신 타고와서 두루마기 걸치고 키보드를 두드렸을까. 컨셉 한 번 웃겼다. 고전미를 살리기위한 '불란서'. 푸하하. 그리고 폴란드에 장기 출장간 아저씨의 블로그 포스트도 생각났다. 온돌을 사용하지 않는 폴란드인들의 무지를 욕하며 바닥에서 자기를 고집했다는 글이었는데 아마 지금쯤 입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내일 아침의 몽생미셸을 기약하며 잠에 들었다.



  1. 정부가 공인해주는 해적. 유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샤락 해적이었다. 정부 입장에선 나랏돈 안쓰고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니 이득이고, 해적 입장에선 안심하고 노략질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본문으로]
  2. 이 지역만 한 해 방문 관광객 수가 150만명이다. [본문으로]
  3. 17번 버스는 오전9시30분, 오후4시 30분 두차례밖에 없다. 역 바로 옆에 버스 정류장이 있기 때문에 단 번에 찾을 수 있다. [본문으로]
  4. 해지기 전에 가서 해질때까지 기다리는게 일반적이다. [본문으로]
  5. 1944년 오버로드 작전 격전지 중 하나 [본문으로]
 노르웨이 오슬로는 생각지 못한 분위기[각주:1]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반면, 파리에 대해선 익히 들었기 때문에 그리 큰 거부감이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파리가 단지 잠시 머물다가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 또한 배경지식 때문이었다.

 비행기는 오후 3시 쯤 코펜하겐에서 출발했다. 공항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허탈할 정도로 쉬운데, 스웨덴 내 집에서 걸어나와서 코펜하겐 공항에 딱 들어가는 순간까지 1시간이 안걸렸다. 미리 적어두는데, 귀국하는 길에는 시간을 재봤다.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의 비행기에서 내리는 바로 그 순간부터 스웨덴 집 안까지 들어가는데 걸린 시간은 단 1시간 10분. 외레순 다리 덕택[각주:2]에 참 편하게 산다.

 샤를 드 골 공항에 내려 RER B[각주:3]를 타고 숙소인 ALOHA HOSTEL까지 갔다. RER이 바로 코앞까지 가는게 아니라 6호선과 12호선을 갈아타는 수고를 했는데, 환승하면서 살펴보니 기차를 타는 몽파르나스 역이 바로 코앞이었다. 그래서 숙소를 참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 철도 근처는 온갖 쓰레기와 오몰로 넘쳐나고 담장은 유럽의 고질적인 문제인 그래피티 낙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건물들은 오래되고 낡았는데 북유럽처럼 품위있게 낡은게 아니라 정말 '사람이 산다.'라는 느낌으로 낡아서, '지저분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로 진입하면서 파리 빈민가를 보게 되었는데 빈민의 상징 아파트 규모에 놀라고 그 위생상태에 더더욱 놀랐다. 그렇게 큰 규모의 복도식 아파트는 처음 봤는데 가로길이가 세로길의 몇배는 되는거 같았다. 게다가 베란다와 복도를 점거하고 있는 온갖 기물들이 마치 몇년 전 인터넷에서 접한 중국 대학교 기숙사같은 느낌이었다.

 제일 처음 접한 유럽 국가가 스웨덴이었기 때문에 몰랐는데, 스웨덴이 정말 빈부격차가 없고 전체적인 삶의 질이 상향평준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스웨덴에 살면서 그 누구에게서도 '가난하다'던가의 느낌이나 이 사회에 빈부격차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파리는 그야말로 정글이었다.
 또 하나 느낀 것은 프랑스인들이 스웨덴인들과 확연히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프랑스인의 특징은 바로 '매부리코'라는 점. 좀 과장해서 말하면 옆에서 본 코의 각도가 30도,60,90도를 이루는 완벽한 직각삼각형처럼 보이기도 한다.[각주:4]
 지하철을 타고 한참 가고 있는데 아코디언 음악 소리가 들린다. 모로코인지 알제리인지, 어딘지 모를 북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이민온 베르베르인[각주:5] 남자가 애절한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돈 구걸. 이것이 바로 예술의 도시 파리란 말인가.[각주:6] "오 예수 영광영광" 거리는 CCM 테잎을 틀거나 녹음된 연주곡을 틀며 구걸하는, 종점만 가면 눈이 뜨이고 다리가 정상인이 되는 우리나라의 사기꾼 구걸인과 비교되는 순간이었다. [각주:7]

 지하철에 내리니 본토 흑형들이 폭풍간지가 아닌 불꽃간지를 뿜으며 돌아다녔다. 주렁주렁 수 많은 피콕킹용 장식을 하고, 선글라스, 타이트한 핏의 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터질듯한 근육. 파리 어느 클럽에서 양사이드에 여자 둘 끼고 놀거 같은 느낌의 흑형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이태원에서 만났던 나이지리아 흑형[각주:8]들이 찌질남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역시 낭만의 도시. 'ㅅ'

 해는 이미 지고 거리에 사람은 없어져서 분위기도 으스스 했다. 왠지 파리 구석진 빈민가로 가면 부랑자들이 석유통에 불피워놓고 있을거 같다. 그러다가 묘한 향을 풍기는 남자가 오면 잡아먹고 그럴듯.[각주:9] 다른 구역에 가면 무섭게 생긴 언니들이 껌 짝짝 씹으면서 50유로를 외쳐대고, 근처엔 알바니아계 갱들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해서, 파리의 밤거리는 인적이 드물어 약간은 두렵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면 범죄자들도 안보인다. -_-; 그냥 아무것도 없다. 호스텔에 도착하니 썩은 표정의 베르베르 직원이 날 맞이한다. 아니, 맞이안하고 앞 테이블 여자랑 잡담하다가 내가 오니 전화가 마침 걸려와서 한참이나 수다를 떤다. 항의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뭐 이런게 파리이겠거니 해서 그냥 기다렸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로 가보니 아이고.. 노르웨이 유스호스텔이 얼마나 품위있는 천국이었는지 확실히 알게되었다. 이놈의 호스텔은 물을 5초만에 한번씩 버튼을 눌러야 나오고, 샤워시설은 더욱 더 엉망이라 찬물 뜨거운물이 랜덤이다. -_-; 역시 이것이 바로 현대 파리의 모습이군.

 방엔 오스트리아에 교환교수인지 교환연구원인지, 어찌되엇던 exchange study를 하고 있다는 중국 마취전문의(의..의느님!)가 혼자 빵을 먹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에펠탑을 보러 나갔다. 숙소가 에펠탑과 매우 가까이 있어서 20분만에 도착했는데, 역시 유명한 관광지는 달랐다. 그 대단한 웅장함은 분명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르겐 송네 피오르드에서 느꼈던 그 느낌과 사뭇 닮아있었다.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데, 공원부터 에펠탑까지 매우 많은 수의 관광객이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있었다. 모두 나처럼 에펠탑의 야경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술에 취해서 관광객들을 비웃는 무어인들 몇명을 피해 에펠탑에 좀 더 다가갔는데 베르베르 청년 한 명이 에펠탑 모형이 단 돈 1유로[각주:10]라면서 물건을 판다. 출발하기 전 마취의가 블랙맨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이 잡상인들을 말하는 것임을 알게되었다. 베르베르인은 그렇게 블랙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앞쪽에 더 많은 수의 잡상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거긴 흑형들도 있었다. 베르베르,무어[각주:11],흑형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이루는 잡상인 무리는 한 눈에 봐도 이들이 불법체류자라는걸 알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루빨리 돈 많아 조그마한 아파트라도 구해 가족끼리 오손도손 모여 살고 싶은게 삶의 목표가 아니라 마약 살 돈이 급해보이는 그들이었다. 

 에펠탑 전망대는 구간별로 요금이 다른데 학생요금[각주:12]으로 8유로 정도 냈다. 구간은 옥상 끝까지. 에펠탑의 특징은 1층 전망대라고 부르는 곳과 2층 전망대라 부르는 상대적으로(-_-) 낮은 높이까지 걸어서 올라가야된다는 것이다. 체력이 안좋은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중간에 쉬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데, 지상에서 바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려올때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모르겠다. 자세히 안봐서.

 고난의 행군 'ㅅ'; 을 마치고 옥상에 도착하니 파리 야경이 한 눈에 보인다. 계획도시답게 구획이 잘 나뉘어져 있다. 아름답다. 그 말 외에는 더 이상 생각이 안났다. 내려오는 길에 에펠탑의 철골 구조를 멍하니 한참이나 쳐다봤다. 엄청 꼼꼼하게, 빈틈없이 이어져있는 디자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대지진으로 한참 시끄러운 터라, 파리에 대지진이 나도 에펠탑은 미동도 하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중국 마취의는 사라지고 슬로바키아 여자애가 덤덤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크리스는 슬로바키아 출신이지만 스페인에서 살았고 지금은 휴학하고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와있다고 한다. 호스텔에 있는 이유는 살 집을 구하기 위한 임시 거처인 셈. 파리 집값이 너무 비싸서 아파트 쉐어[각주:13]만 해도 한달에 100만원이 넘게 깨진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계약을 하려면 부모님 소득같은 것도 일일이 다 적어야 한다며 불평했다. 여행을 온게 아니기 때문에 내일 일요일엔 할 일이 없다면서 나보고 할 거 없으면 자기랑 놀러가잔다. 내가 내일 노르망디로 떠난다고 하니 많이 아쉬워했다. 마렉 함식[각주:14] 이야기도 했는데 잘 모른다. 역시 여자들은 축구를 그리 안좋아하나 보다. FM하면 마렉 함식부터 영입하는게 진리이거늘 'ㅅ' =3

 아침엔 나 혼자 일찍 깼다.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주는데 싸구려 바게뜨와 버터, 그리고 시리얼이 제공됐다. 혼자서 구석에서 순대국 먹듯이 쳐묵쳐묵[각주:15]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몽파르나스에 가서 생 말로로 가는 기차를 끊었다. 가격이 65유로 -_-; TGV로 3시간 걸리는 거리고 파리 물가가 세계 최고 수준임을 감안하면 그리 비싼 가격이 아닌데, 내 비행기 티켓값이 10만원이 안되는걸 생각해보면 기분이 참 이상하다.

 그리고 9시. 드디어 프랑스 여행의 목적지인 노르망디와 브르타뉴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엔 파리병이란게 있을 정도로 환상이 심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프랑스 파리에 대한 환상이 심하다. 하지만, 분명한건 현대 프랑스 파리는 그런 낭만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음침하고, 구질구질하고 꽤나 우울한 도시였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낭만의 프랑스는 노르망디나 남프랑스같은 곳에 가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여행지를 그곳으로 정하기도 했고.












  1. 생각외로 글로벌해서 놀랐다. 이민자들이 많이 살아서 오슬로는 더 이상 백인들의 도시가 아니다. [본문으로]
  2. 2000년대 개통된 덴마크-스웨덴을 잇는 거대한 다리. [본문으로]
  3. 지하철과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추측컨대 EXPRESS의 개념 아닐까. [본문으로]
  4. 첨언하자면 머리새도 다르다. 스웨덴인들은 금발인데 프랑스인들은 짙은 갈색. [본문으로]
  5. 북아프리계 토착민. 북아프리카가 프랑스 식민지였기 때문에 많은 수의 이민(합법, 불법 모두..)자들이 파리에 건너와서 산다. 리비아 문제에 프랑스가 적극 개입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역사적 맥락에서 기인. [본문으로]
  6. 라고 하지만 솔직히 좀 조소에 가까운 말. [본문으로]
  7. 사족으로, 우리나라 지하철 구걸계의 전설은 역시 '안산 사랑의 집'인거 같다. [본문으로]
  8. 이태원에 가면 나이지리아 출신인데 미국 출신인척 하는 흑인들이 많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미국 흑인을 더 좋아해서 그런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소설 '향수'의 그르누이 이야기. [본문으로]
  10. 한화 약 1700원 [본문으로]
  11. 베르베르계이지만 혼혈이란 점에서 다르다. [본문으로]
  12. 학생증 검사를 안한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듯. [본문으로]
  13. 방 세개짜리 아파트가 있다고하면 방 하나를 쓰는것. 다른 공간은 공용으로 사용하고.대도시에선 꽤 흔한 듯 하다. 미국이나 호주 유학생들도 많이 이용하는 방법이라 들었다. [본문으로]
  14. 슬로바키아 출신 축구 선수. 세리에A에서 뛰고 있다. [본문으로]
  15. "니들 순대국 먹을 땐 구석에서 죄지은듯 고개숙이고 먹어라" 라는 고파스 명언이 있다. [본문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본 것 중 인상 깊은 것은 버려진 집들이었다. 창문이 없고 나무가 썩은 폐가가 여럿 있었는데 그 주위엔 색을 이쁘게 칠한 다른 집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집들의 문앞에 있는 눈이 전혀 치워지지 않은걸 봐선 사람이 지금은 살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아마 여름 별장일까? 모르겠다. 가기전 보았던 어느 블로그에선 이런 산에 지어진 집을 세금을 내기싫어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지은 집이라고 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그 블로거의 이야기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개드립'인지 깨닫게 되었다. 알아보지 않아서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생각엔 이 마을은 철저하게 구역화되어있고 주택들은 잘 감독되고 있는 듯 했다. 무슨 와일드 웨스트도 아니고. 

 가는 길에 본 이쁜 교회와 집. 보스에선 석조교회였지만 이 근처에선 목조교회이다. 내부도 분명 매우 작겠지. 
 

구드바겐에 도착한건 3시 30분정도였는데 기사가 다 와서 하는 말이 자기가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 올 때 쯤 생각해보니 겨울이라 페리가 더 이상 운행을 안할거란다. 미리 이야기해야되는데 확신이 안서서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 한다. 여름에는 페리가 5시이후로도 운행하는데 겨울이라 5시에 구드바겐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지막이고, 플롬으로 가는 것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내로 오슬로로 가야되는 나의 일정을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보스로 돌아가는 버스는 4시 40분 쯤에 있었는데 그 사이 시간을 잠시 구드바겐에서 보냈다. 


 구드바겐은 정말 산골짝 동네로 인구가 천 명도 안될 듯 싶었다. 역에서 읽은 관광 안내책자에는 인근 마을에 대한 정보들이 적혀있었는데, 인구가 말도 안되게 적은 곳들이 여럿 있었다. 구드바겐은 플롬으로 향하는 페리구간이 있는 곳으로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듯 했다. 갔을 때는 시즌이 비수기인지라 정말 아무도 없었다. 

 기프트샵도 문을 닫았고, 페리 선착장 대합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이 대단한 세계적인 관광지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란! 마음껏 소릴 질러도, 뭔 짓을 해도 아무도 볼 수 없다. 오히려 일정이 꼬여버린게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근처 집들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건축의 아름다움은 주변과의 조화, 양식의 통일에서 나온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인 이유 탓에 통일되지 못하고 뒤죽박죽의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정부에서 새마을운동 때 지붕개선 사업을 했던 것처럼 모두 한옥양식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좀 비현실적인 말이긴 하다. 혼자서 전통 한옥양식으로 지어진 주택들로 가득한 한국의 시골모습을 생각해보았다. 서양인들이 흔히 가지는 동양의 신비 라는 이미지에 딱 맞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버스를 기다리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차들이 몇대 지나간다. 이 협곡의 설원 위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이상했겠지. 인간의 정주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국을 떠날 때 방을 비우면서 느꼈던 감정이 정주욕이었나 보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가며 생각해보니 계속 방랑하는 삶도 여유만 있다면 당분간은 꽤 괜찮을거 같기도 했다. 그럼 애초에 방 뺄 일도 생기지 않을테고.


 버스는 안오고 해가 지기 시작해서 조금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밤이 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목욕탕 사우나가 생각나는 따뜻한 대합실이 있었기에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아스라히 산 너머를 쳐다보니 달이 보인다. 그 때 비행기 한 대가 비행운을 그리며 산위로 솟아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바보같았는데 그 때만큼은 그 장면이 정말 낭만적이라고 느꼈다.

 99년 2학기 개학 할 때가 생각난다. 내가 살던 곳은 지방 중소도시로 그 때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어린이는 유복한 가정의 자녀들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거의 다 부모님 중 한 분이 의사나 교수였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같은 반엔 소위 부자집 아들인 W가 있었는데 W와 나는 99년 4학년때 정말 자주 어울렸다. 같이 논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때 가장 유행이었던 구슬동자 장난감을 W는 거의 매주마다 하나씩 새로 샀기 때문이었다. 걔 집에 가면 온갖 특이한 구슬동자 로봇은 다 볼 수 있었다. 

 W에 대해 잠깐 더 이야기하자면 그의 집에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오만불손한 태도로 아주머니를 대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나라 음식은 못먹겠다며 유치한 투정을 부리던 모습도 생각난다. 

 어쨋든, 선생님은 W가 이번 여름에 유럽 4개국을 갔다왔다고 교실 앞에 불러내어 친구들에게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이야기하게 했다. 집에 있던 책으로만 다른 나라를 여행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W의 여행담은 걸작이었다.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기억은 자극의 강도가 셀 수록 선명해진다. 몇 안되는 4학년의 기억 중 하나가 그것이니 그 때 당시의 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W가 말하길, "그 곳 사람들은 머리색깔과 말이 달랐습니다." 이게 다였다. 당황한 선생님이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하자 "그 곳 피자는 맛이 없고 쓴 맛이 났습니다."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어찌나 한심해 보이던지. 아니, 어린 아이에게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건 무리겠지만 초등학생 수준에서 여행에서 느낀다는 것이 딱 저정도일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참 돈이 아깝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나서 정류장에서 혼자 깔깔 웃었다. 난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애초에 피오르드가 꼭 강(어디선가 보니 저게 강물이 아니라 바닷물이라던데. 근데 내지인걸 봐선 강이겠지.. 아니면 말고;) 물과 함께라야 피오르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관광책자 등에 꼭 저런 사진이 소개되는 이유는 아마 강과 어우러진 모습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페리가 끊겼다고 해서 0.5초 정도 실망했는데 선착장 주위에서도 볼 건 다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송네피오르드 투어 자체가 기차,버스,페리 등을 갈아타면서 하루 종일 이동하며 주위 자연을 구경하는 것이라 이미 입은 벌어질 대로 벌어진 후였다. 


 혼자서 사진을 찍고 타이머를 이용해서 열심히 놀고 있을 때 즈음 버스가 오고 있었다. 열심히 손을 흔들어 불러세웠다. 버스에 앉아 대각선 왼쪽 앞 승객을 보니 열심히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다. 폰을 열어보니 버스안에 와이파이가 된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보스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고, 숙소를 찾아야 했다. 이미 오슬로로 가는 기차는 없는 상황. 유스호스텔을 가니 스키타러 온 손님들로 만원이고 재즈가 흐르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F 호텔도 만점. 결국 그 건너편 호텔에서 덜덜 손을 떨며 숙박비를 지불했다. 여기서 노르웨이 물가를 소개하자면,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스웨덴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물가를 가지고 있는지 실감했다. 덴마크는 양반이었다. 단순히 환율상으로만 따지면 스웨덴 물가는 우리나라의 1.5~1.7배이고, 덴마크, 노르웨이는 우리나라의 두배이다. 평소에 이를 척도로 물가를 계산해왔는데 (왜냐면 스웨덴 물가가 우리나라 물건값에 0을 몇개 뺀거라서 그냥 환율공식대로 1.7배 해버리면 된다.) 노르웨이에 도착하고 나서 그게 바보같은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환율이 1.7배,2배라는 것과 물건 판매가격은 별개였다. 

 그냥 이해가 쉽게 예시를 들자면 스웨덴에선 500ml 코카콜라가 2천5백원정도인데 노르웨이에선 5천원이 넘어간다. 구닥다리 샌드위치가 2만원. 200ml짜리 초코우유가 6천원이다. 베르겐이나 보스에서 오슬로로 가는 5~6시간 가량 걸리는 기차 티케값은 학생할인을 안받은 일반 성인가격이 우리나라 돈으로 14만원가량이다. 그래서 3성 호텔 숙박비 20만원은 오히려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나라 호텔들도 10만원은 훌쩍 넘고 20만원 가량을 받으니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노르웨이가 전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라고 한다. 소득수준이 높은 자국민에겐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소득수준이 이곳 나라보다 못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치명타다. 교환을 스웨덴으로 쓴 걸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덴마크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물가이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보스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 9시에 출발하는 오슬로행 기차를 탔다. 가장 최저가격으로 달랬더니 패밀리석을 끊어줬길래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타자마자 이해가 갔다. 가족석 구간은 ADHD 장애를 앓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 될 정도로 과하게 활발한 각국의 아이들이 '날뛰고' 있어서 이어폰이 없었다면 아마 고통 속에 시달렸을 것 같다. 내 옆자리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리가 다 새어나오는 이어폰을 끼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음악이 멜스메나 데메 혹은 블메가 흘러나오는걸 봐선 아마 노르웨이인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오슬로에 도착했다. 오슬로의 날씨는 딱 돌아다니기 싫은 날씨였고, 이미 일정이 뒤틀려서 방문 예정이엇던 8~9곳 중 많아야 두 곳을 갈 수 있었다. 결국 선택한건 가까이 있는 뭉크 박물관이었다.


 에드워드 뭉크의 그림은 <절규>가 가장 유명하다. 다행히 그 작품은 이 박물관에 있었다. 60년대에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박물관은 규모가 작아서 대다수의 작품은 국립 미술관이나 다른 미술관에 흩어져있고 이곳 박물관에는 작품을 로테이션해 전시한다고 한다. 

 책에서 봤던 여러 작품들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는데 예술에 조예가 없던 탓에 '미학'의 관점에서의 접근은 전혀 불가능 했다. 인상깊었던 것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뭉크가 화가 뿐만 아니라 작가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뱀파이어였다. 십수년에 걸쳐 뭉크는 똑같은 구도의 그림을 여러번 그렸는데 제목이 뱀파이어였다. 여성이 남성을 안고 피를 빠는 모습. 왜 뭉크는 그 그림을 여러번 그렸을까? 오디오 안내라도 받을껄. 얼핏 본 기억으론 절규도 여러 점이 있다고 한다.

 관람객 중엔 중국인 중년 아저씨들도 있었는데 말은 하지 않아 중국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들이 중국인이 아니라면 나는 내 머리를 먹을 것이다. 중국인은 중국인처럼 생겼다. 그리고 한국패션을 하고 한국얼굴을 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한국여성도 두 명씩, 두 무리를 보았는데 가까이서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예상대로 한국 사람이었다. 한 쪽은 지하 물품보관소에서 봤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행자 카페등에서 만나 같이 여행하는거 같은데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있는 듯 했다. 역시 저럴 바에는 혼자 다니는 것이 낫다.

 오슬로는 솔직히 말해서 실망스러웠는데 그 이유는 오슬로에선 유럽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현대적이라 구경하는 즐거움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긴건 노르웨이인이 아닌 무어인과 중동 지역 출신 무슬림들이었다. 프랑스 파리가 무어인의 도시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슬로가 이렇게 무슬림들도 뒤덮혀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길거리에선 차도르,부르카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아랍계 이민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 보았다. 

 무어인은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다. 카스티야 왕국, 레콩키스타, 엘 시드 로드리고 디아즈, 알 함브라 궁전 같은 키워드들이 주르륵 이어지는 바로 그 무어인들 말이다.
 하지만 무어인하면 일반적이 사람들이라면 대개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를 떠올릴 것이다. 음, 근데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정확히 어느 지역 출신이 많지? 모르겠다. 

 아무튼, 과도한 이민자로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사회 분위기가 이민자에 적대적으로 변하고, 그것이 정치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한국을 떠나기 전에도 보았다. 룬드 바로 옆 말뫼는 인구의 1/3이 이민자인데 이민자를 상대로 한 총기 살인사건도 발생했다 한다. 이곳 북유럽 이민자들에게선 범죄라던가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 밤에 버거킹에서 봤던 10대 양아치들이나 보스의 노르웨이 스킨헤드 성님들이 위험하면 더 위험하지. 노르웨이 성님들의 "White power" 이야기는 이런 최근의 추세에 의한 것이 아닐까. 근데 북쪽에는 이민자들이 거의 없는데 왜 스킨헤드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청소년들의 치기인지.

 공항에서 기념품으로 이쁜 '구'를 샀다. 구 안에 바이킹 배가 있는 기념품이었다. 그리고 그림엽서(사진엽서?)도 5장 샀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_-; 많이 살 수 없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편지를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공간이 부족해져서 아쉬웠다.

노르웨이에서 다시 덴마크로, 그리고 스웨덴으로 2시간만에 주파한 나는 룬드 역에서 자전거를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타고 집으로 왔다. 룬드에 처음 왔을 때는 길을 잃어 헤맸는데 이제는 해외여행 갔다와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향한다. 경험만큼 큰 스승은 없는거 같다. 

 

 



















 피오르드를 보러 겨울에 갈지 여름에 갈 지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나에겐 대항해시대와 모로윈드의 노드족 덕택에 노르웨이 = 겨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봄의 유럽은 이글스 네스트가 있기 때문에. 'ㅅ' =3 

 금요일 오후에 있었던 수업은 영화 수업이었는데 역시 예술은 나와 거리가 먼 듯 하다. 예술가의 선입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섬세한 터치와 우아한 목소리의 교수님은 수업내내 영상미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저 따분하게만 느껴졌다. 그나마! 대중적인 핀란드 영화 '과거없는 남자'는 분명 집에서 나 혼자서 직접 찾아봤다면 재미있었겠지만 이미 앞부분 수업에 질려버려서 별로 재미가 없었다. 

 집에서 어물쩡대다가 스웨덴을 떠나 덴마크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까지 한시간 가량 남았는데, 체크인부터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은 대개 셀프 체크인을 이용한다. 내가 이용한 노르웨이 항공은 예약번호만 입력하면 항공권이 발권되어 나왔는데, 예약번호만으로 발급이 가능한건 조금 문제가 있는거 아닐까 싶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악한 마음을 먹고 남의 항공권을 가져가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렇게 비생산적인 일을 할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 그래서 굳이 보안 장치를 마련해두지 않았나 보다.

 코펜하겐 공항 환전소에서 덴마크 돈을 모두 노르웨이 크로나로 바꿨다. 그렇게 비싸보이던 덴마크 크로나도 노르웨이 크로나 앞에선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노르웨이에 도착한 후에노르웨이 물가에 경악하기 위한 전초전이랄까.

 저가항공은 처음 이용해보았는데, 그냥 여타 항공 서비스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단지 기내식이 유료라는 정도? 단지 그것 뿐이었다. 약 80~90분간의 비행(아마도..) 끝에 베르겐에 도착했다. 베르겐의 첫 인상은 분명 스웨덴이나 덴마크와는 다른 고지대라는 것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산 굽이굽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내일 해가 떴을 때 분명 아름다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르켄 게스트하우스는 저가의 유스호스텔인데, 호스텔 이용이 처음인 나는 서비스의 질이 어느 정도일지 그저 궁금하기만 했다. 결과는 대 만족. 역시 소득수준이 나라는 저가라도 어느정도의 최저 급이란게 존재하는 듯 하다. 한 방에 4~6명 정도 자는걸 빼곤 시설은 매우 좋았다. 다만 비누가 없었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가져간 비누가 요긴하게 쓰였고, 샴푸도 있긴 있었는데 과연 공용 샴푸였을까 다른 사람의 샴푸였을까.. 확신이 안섰다. 샴푸는 있는데 비누가 없는건 또 이상하고. 어쨋든 편하게 하룻 밤을 보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냥 대략적인 일정만을 가지고 출바했던 나는 아침 9시가 조금 못되어 기차역에 도착했는데 보스로 향하는 기차가 10시 28분이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어느 후기에선 8시라고 했던 기억이 났는데, 뭐 그냥 조금 늦게 가게 된느거겠지.. 하고 말았다.

 분명 도시 어딘가에 전망대가 있을텐데 그냥 대충 아무 고지나 찾아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은 흡사 안암동을 연상케 했지만 건축 양식이 통일되어 약간은 우아한 멋을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저분하다'라는 느낌의 안암동과는 달랐다. 아아... 올해도 안암동3가 오거리슈퍼 주민들은 자기 마당 청소만 할 것인가. 'ㅅ' =3 아무튼.. 

 높은 곳에서 바라본 베르겐은 아름다웠다. 눈이 안녹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눈 없는 겨울은 황량하니까. 고개를 동쪽으로 돌려보니 항구와 배들이 보였는데 왠지 친숙한 이 느낌은 뭘까... 아아.. 베르겐에 16세기에 자주 방문했던거 같은 그런 기분 'ㅅ' 게임 중독인가보다.

 
 근처 집의 건축 양식을 유심히 보았다. 나무로 되어 있었다. 노르웨이의 건축 양식은 덴마크나 스웨덴처럼 우아한 멋은 없지만 단조로움에서 오는 색다른 멋이 있다. 기본적으로 지붕을 제외한 벽면 전체를 단일 색으로 칠한다. 녹색,노란색,빨간색,흰색 등등.. 그리고 창문틀을 벽면 색에 어울리는 색으로 다시 칠한다. 깔끔하면서도 색의 조화가 어우러져 정말 아름답다. 
 

 구드바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노르웨이 청년에게 노르웨이 가옥이 나무로 되어있는지 물어보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한참이나 집들은 살펴보았는데, 왜냐면 아직도 목조가옥에서 산다는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석회로 만들고 겉면에 그냥 나무를 덧댄건 아닐까? 나무가 아니라 나무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아닐까? 여러 의구심이 들었는데 노르웨이 사람이 나무라고 하니 그렇게 믿어야 겠다. 앞서 이야기하지만 이런 노르웨이 전통 건축 양식은 (만들어진 전통일지도 모르겠다. 근대의 산물일지도.) 오슬로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슬로는 대다수 건물이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어서 딱히 유럽스러운 느낌은 나지 않았고, 아파트가 그나마 전통 양식을 계승했는데, 나무가 석회로 변하고 색칠은 그대로이니 뭐랄까, 단조로운데 멋은 덜 하다랄까. 사진을 찍지 않은게 후회된다.
   


 기차는 한 시간을 달려 보스(Voss)에 도착했다. 보스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그야말로 설원이었다. 딱히 피오르드는 여기부터다! 라고 정해진 것이 없든 이곳 주변의 기기묘묘한 풍경이 온 도시를 휘감고 있었다.


 이곳에선 유럽에 온 이후 몇 안되는 살을 애는 추위를 느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지형의 높이도 모르고 원래 무슨 땅인지 알 수도 없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 발이 젖어버렸다. 기차역 대합실에 들어와 양말을 갈아신는데 동상에 걸리는 아픔이 이런건가 싶었다. 위 사진에 뿌연 안개같은 것이 있는데 눈발이 휘날려서 생기는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것이 분명 구체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는 연기 비슷한 것인데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이라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설원 한 복판에 공간이 있길래 가까이 가보니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였다. 그곳의 벽면에 칠해진 낙서를 훑어보다가 다급히 여분의 속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는 농담이고 바로 이곳은 스킨헤드 성님들;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추운 겨울밤 이곳에서 노르웨이 스킨헤드 성님들은 마약도 하고 그래피티 예술(..)도 손보이며 White power를 주창했던 것이다. 가끔 정령신앙축제도 벌이고 동양인 납치해서 스너프 필름도 만들고 그랬겠지. 아아.. 사탄 숭배,트롤,블랙메탈,스킨헤드,끝없는 설원.. 역시 음침한 노르웨이 다웠다. 


 이곳에서 진정한의 의미의 설송(雪松)을 보았다. 아니, 소나무는 아니구나. 눈꽃으로 정정해야 함이 옳겠다. 우리나라에도 눈꽃열차같은게 있다고 하는데, 국내 여행을 거의 다니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런 세세한 가지 하나하나가 눈으로 장식된 나무는 생전 처음 보았다.  그 아름다움이 어찌나 탁월한지 마치 중학교 시절 방학 독후감과제로 나온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속 프랙탈이론을 다시 읽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봄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길임을 확신했다. 햇살은 따스하지만 눈은 녹지 않는다. 


 이곳의 눈은 내가 겪었던 눈과는 달랐는데, 무엇이 다른가 하니 눈을 밟았을때 발자욱이 그대로 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눈이 서걱서걱 부서지면서 자욱이 생긴다. 아마 날씨가 더 추워서 좀 더 꽁꽁 얼었기 때문일까? 날씨가 한국만큼이나 추워서 사진을 찍다보니 볼과 코가 술에 취한 사람마다 새빨개져 있었다. 장갑은 어찌나 방한기능이 안좋은지, 이정도 날씨 속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무잎,가지 하나하나가 얼어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바닥에 솟아있는 돌드은 다름아닌 묘지 비석이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지 알 수 있는 사진. 못해도 70cm는 쌓여있었다.


 보스의 교회. 교회내부를 구경하려 했지만 문이 걸려있었다. 룬드 대성당은 항상 열려있던데(그랬던가? 'ㅅ';)


 이곳은 스키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겨울에도 시끌시끌하다. 


 밤에 돌아다니면 유령이라도 나올까? 


 보스에 도착한건 정오 쯤이었지만 구드바겐으로 가는 버스는 2시 30분에 있었다. 버스 승객은 나와 노르웨이 청년 하나. 버스 기사가 나에게 피오르드 보러 가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페리가 다섯시 쯤에 올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버스는 출발했고 그것은 예상치 못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마르켄에서 8시쯤에 기상한게 시작이었던가.


안녕하세요. 지난주였나.. 10일전이었나.. 아무튼 언젠가 -_-; 덴마크 코펜하겐을 당일치기로 다녀왔습니다. 총 소요 경비는 가는데 2만원 오는데 2만원가량 해서 약 4만~5만원 정도 들었네요. 코펜하겐에서는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최적의 루트를 위해 구글맵을 이용해서 최단거리 루트를 짰습니다. 구글맵을 이용하면 지도대로만 따라가면 관광지가 차례대로 나오니까 정말 편해요.

어차피 몇번이고 다시 갈 수 있는 곳이니까 최대한 해 지기전에 중요한 곳만 보고 돌아가자.. 라는 맘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의외로 관광이 빨리 끝나서 몇군데 더 봐도 될 뻔 했습니다.
 
아 참고로 저는 스웨덴에 살고 있어서 자주 갈 수 있는거에요! 



Osterport st에서 출발해서 (Kastellet)인어공주상 -> 아멜리엔보르그 궁전 - > 뉘하운 운하 -> 크리스티안보그 궁전 -> 티볼리 광장,티볼리 공원 -> Norreport st로 짰습니다. 

코펜하겐 공항에서 지하철을 타시면 기차역으로 금방 갈 수 있어요! 


 코펜하겐으로 가기전에 역 모습 한 컷.


 일반석을 끊었는데 어리석게도 짐칸(짐 있는 승객을 위한 칸. 사진에 보이지요? )에 앉아 갔습니다. 저는 저 뒤에 보이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기차 객석이 이 나라에서는 일등석인줄 알았습니다.. 돌아올 땐 제대로 앉아왔답니다.. 50분만에 코펜하겐 도착!


 가기전에 덴마크 건축양식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스웨덴 건축 양식과 비교해보니 뭐가 다른지 알 것도 같습니다. 제 추측으론 덴마크 건물들은 사각형 모양의 창문이 정말 다닥다닥 붙어있는거 같습니다. 스웨덴 건물들은 창문이 좀 우아하다고 해야할까요.. 덴마크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지도 않습니다.  뭐 이건 그냥 느낌만으로 추측한겁니다.



 겨울이라서 관광객이 없고, 북유럽 자체가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이라 정말 한산했습니다. 


 인어공주상을 향해 가는길입니다.


다리 위에서 찍어본 코펜하겐역의 모습. 제가 살던 한국 고향에도 저런 큰 철길이 있었는데, 철도 모습은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네요.


 여긴 사실 방문할 계획이 없었는데 도대체 뭐 하는 곳인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별 모양의 섬이라니. 관광지? 공원? 모양으로 봐선 인공적으로 만든건데..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결국 들어가보았습니다.

 저~기 보이는 것이 왕의 문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이때부터 슬슬 느낌이 왔다가


 문이 의외로 길다는 사실에 점점 엄습해오는 그 무언가를 느끼며.


 얼어있는 강의 모습과


대포를 보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여긴 요새였습니다. 출구가 두곳인가? 밖에 없는 요새였습니다. 찾아보니 17세기에 만들어진 방어요새라고 하네요. 지금은 시민들을 위한 공원정도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조깅하는 사람, 산보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이곳의 명치인 Kastellet 의 뜻이 요새 라고 하네요. 



 몇 인치 포일까요.. 모양새로 봐선 나폴레옹 시대 이전의 것을 본 뜬거 같은데요. 아는게 별로 없어서.. ^_^; 


 포의 시선으로 보는 요새 밖.. 




 요새를 한바퀴 도는데 인어공주상이 보여서 내려가려 했더니 요새답게 출구가 없어서 다시 빙~ 돌아 나갔습니다. 인어공주상 근처에 있는 여신상인데 설명이 없어서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인어공주상이 있는 해안가입니다. 선착장 인근은 물이 얼어있지만 다른 곳은 녹아있습니다. 노르웨이 베르겐도 부동항인데 설마 코펜하겐이 부동항이 아니겠어요?


 듣던대로 인어공주상은 정말 조그마했습니다. 관광도 저 포함 3명밖에 없어서 괜찮은 사진이 나올때까지 열심히 셔터를 눌렀습니다. 타이머 맞춰두고 인어공주와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겨울철에 확실히 좋더군요. 여름이었다면 타이머로 혼자 촬영하는건 다른 관광객들에게 상당한 민폐였겠지요. 

 벤치에 앉아서 한 동안 쉬었습니다. 평온한 기분을 한 동안 만끽하고 일어났습니다. 근처에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을 데리고 나와 야외수업을 하는데, 덴마크도 그렇고 스웨덴도 그렇고 아이들을 정말 추위에 강하게 키웁니다. 날씨가 추우면 따뜻한 실내로 피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정반대인거 같아요.


 덴마크 전 국왕의 동상입니다. 새똥 폭탄을 맞은 모습이 좀 애처롭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있는 교회. 유럽 교회들은 외부 모습은 다 제각각인데 안을 열어보면 거의 다 비슷비슷합니다. 


쭉~ 걸어가다 보니 아말리엔보그 궁전이 나옵니다. 겨울은 관광 비수기라서 각종 보수공사가 많이 이뤄지는데요, 이곳에선 중앙 동상 부근 보수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궁전 내부는 들어가볼 수 없구요 근위대 퍼레이드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몇 분 간격으로 하는지 그런거 안알아보고 갔고, 애초에 생각도 없었는데 재수가 좋아서 도착한지 3분 여만에 퍼레이드를 시작했습니다. 경찰의 삼엄한 통제속에 진행됩니다.


 이건 퍼레이드 끝무렵 사진인데요, 앞에 깃발을 들고 건물안으로 들어가는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 진행되서요. 


 음악과 함께라 더 즐겁습니다. 아, 이곳에서 주의점은 근위병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근위대 중 특정 구역에 서 있는 병사와는 찍을 수 없습니다. 다가가려고 하기만 해도 경찰이 고함을 치면서 제지하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번 퇴짜를 맞고 다른 쪽 근위병과 사진촬영에 성공했습니다. 역시 근위병은 사진을 찍던 앞에서 뭘 하던 정면만을 응시하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궁전을 빠져나와 쭉 가다가 도착한 뉘하운 항구입니다. 이 근처 건물은 유독 형형색색이더군요. 사진에 보세요! 색깔이 참 알록달록하지요? 



 이것저것 찍고 배 앞에 서서 기념촬영도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길가에 있던 엔틱 상점! 쇼윈도에 보이는건 바이올린용 목재라고 해야되나요.. 신기해서 찍어봤습니다.


 Oliver Antik이라는 가게였습니다.


 이것도 신기했습니다. 이 지하로 통하는 문은 저는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에서만 봤거든요. 


 덴마크 은행입니다. 유럽은 우리나라나 다른 아시아 국가처럼 거리가 요란하지 않습니다. 그냥 옛 건물에 글자 몇개 세겨놓는게 다입니다. 건축양식의 통일,간판의 간소 및 최소화가 도시미관을 정말 아름답게 해주는데요.. 건축 양식은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적 특성상 어렵지만 간판 문제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간판 문제는 오래전부터 각종 매체를 통해 지적되오던 건데, 서울 일부 지역에서는 간소화를 하고 있긴 하지만 안그런 곳이 더 많기 때문에 깔끔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을 수 없는게 현실입니다.


 아! 여행갔다온지 10일가량 지나고 쓰는 글이라 누구인지 잊어버렸습니다..


 크리스티안보그 입니다.  현재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답니다. 아말리엔보그 와는 다르게 주차되어 있는 차들과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요. 아! 그리고 여기 바로 옆에 국립박물관이 있습니다. 전 월요일날 가서 휴관이라 못들어갔지만 화~일은 개관합니다!


 

 정원이 황량하네요. 바닥이 그냥 흙인거 봐서는 봄에도 잔디가 아니라 그냥 흙바닥일까요?
흙바닥 한가운데의 분수를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지요..


 크기가 굉장합니다. 


 가다가 발견한 도미노피자! 이곳에도 배달서비스가 존재하는군요. 제가 사는 스웨덴에는 홈 딜리버리 서비스가 거의 없습니다.


 덴마크의 2차대전 영웅 Anders Lassen의 흉상입니다. 1940년에 영국군에 입대해서 독일 제 3제국에 대항해 싸우다 1945년 작전중 전사했습니다. 자신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 성공과 동료들을 위해 호송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티볼리 광장입니다. 여기 쯤오니 피곤하더군요. 도보여행의 단점인가 봅니다. 예전에 도쿄를 일주일정도 갔었는데 3일쯤부터는 너무 힘들어서 친구와 긴자의 백화점 지하에 멍하니 앉아서 두시간 가량을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도쿄때처럼 여름에 간게 아니라 상대적으론 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피곤하긴 피곤해서 그냥 지나치면서 보고 바로 역으로 향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Norreport역. 코펜하겐 중앙역의 남쪽역입니다. 저의 여행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총 소요시간은 두시간 가량 걸렸던거 같습니다. 역 북쪽으로는 전혀 가지 않았는데 나중에 다시 올 때는 북쪽의 다른 관광지도 방문해야겠습니다. 

아! 스웨덴이나 여기나 기차 티켓 끊을 때 카드만 받는거 같더군요. 무인티켓발행기가 있는데 현금을 넣을 수 있는 곳이 없어보였어요. 저는 스웨덴 은행인 SEB에서 발급한 마에스트로 카드(유럽 체크카드)가 있어서 별 문제 없었는데 만약 그냥 한국에서 여행오시는거면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던가(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VISA마크가 붙어있는 한국카드를 가져오는게 좋을거 같아요.. 음.. 인포를 통해서 현금으로 티켓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안찾아봐서..

궁금하신거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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