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말로는 브르타뉴 지방에 속한 도시로, 파리에서 TGV로 3시간이 넘게 걸리는 매우 멀리 있는 도시다. 브르타뉴는 프랑스 북서쪽 에 있고 그 옆은 노르망디이고 북쪽으로는 영국의 본머스가 있다. 생 말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적들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았는데, 17세기에는 유럽 각국의 샤락 정책[각주:1]에 따라 해적들의 활동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해적 활동은 19세기무렵부터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 지금은 유럽에서 인기있는 휴양지 중 하나[각주:2]가 되었고 크레페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여행을 가면 길 잃기 싫어서 되도록이면 걸어다니는데, 생 말로 역에서 생 말로까지 한참을 걸었다. 도착할 쯤 되니 파리에서 엄청나게 걸었던 것 때문에 다리가 너무 아파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성 입구에 들어가는 순간 그런 피로는 싹 풀렸다.
 


 파리가 쓰레기와 오물, 부랑자들이 넘치는 음침한 곳이라면 브르타뉴 생 말로는 그야말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였다. 모든 건축물이 옛 방식 그대로 서유럽의 석조양식을 가지고 있고, 거리 어디에도 아스팔트 도로가 없는 그야말로 옛 유럽의 모습이었다. 
 


 계절도 매우 따뜻한 봄이라서 노천카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넘쳐났는데, 평소 까페 이용을 거의 하지 않는 나도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은 충동을 들만큼 거리는 낭만적인 향기를 뽐내고 있었다. 
 


 샤락 해적들이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며 피식 웃던 차에 곳곳에 벤치가 마련되어 있는 미니 정원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흔히들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하면 당연히 망설임 없이 빅토르 위고와 프랑수아르네 샤토브리앙을 떠올릴 것이다. 이 중 샤토브리앙이 바로 이 생 말로 출신이다. 빅토르 위고는 내 다음 목적지인 몽생미셸의 관광지화에 일조화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샤토브리앙 작품을 읽으면 프랑스보다는 이탈리아를 가고 싶어지니 그의 고향과, 현재의 위상 등을 생각해보면 좀 아이러니 하다.
 


 생 말로는 크레페로 유명한데, 왜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일본 도쿄 여행을 갔을 때 크레페라는 음식을 처음 접해본 결과 그 흐물흐물한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때문에 콘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사진은 이미 절반정도 파먹은 것이다. 베스킨라빈스에 왜 저 맛이 없을까 아쉬움이 들면서, 만약 저 레시피를 알아내서 학교 근처에서 장사하면서 분명 전국적으로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각종 레지옹 깃발들이 걸려있다. 생 말로나 몽생미셸의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고 느낀건데, 저 사진에 나와있는 것처럼 퀘백을 참 많이 아낀다. 
 


성벽 위로 올라가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켈트 해가 너무 아름다워서 파리를 버리고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암초위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황금빛 해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스페인 말라가 쪽을 La costa del sol이라 하여 '태양의 해변'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도 무언가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전망대에도 30분 넘게 그냥 가만히 있었다. 홀로 여행하는 즐거움은 여행 중의 사색과 자유로움에서 온다. 깃발보고 가이드 졸졸 따라다니느라 바쁜 단체 관광객들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이런 여행이 더 취향에 맞는다. 



 중학교 때 활동하던 동호회의 30대 회원 홈페이지에는 유럽 각국을 혼자 돌아다니며 쓴 여행기가 있었는데, 어릴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막연히 나도 나중에 저렇게 혼자 여행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해냈다.  게임 대항해시대 하면서 아일랜드 더블린이 어디있는지 몰라 지구본을 돌려가며 찾던 시절이 어제같은데.

 생 말로에서 퐁토르송으로 가는 버스는 4시 30분에 있었다.[각주:3] 퐁토르송 역에 내려 숙소 주인 아저씨의 픽업을 받아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퐁토르송 중심에서 한참을 벗어난 시골에  있는 전통적인 석조 가옥으로, 영국인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프랑스에 영국인이 살고있는건 그리 낯선건 아니지만, 처음엔 당연히 프랑스인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저녁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몽생미셸의 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해는 지고 있어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주인 아주머니께 자전거 좀 빌릴 수 있냐해서 자전거를 빌려 길을 나섰다. 자전거로 몽생미셸을 방문하는 사람은 여럿 있었기 때문에 친절하게 쓰여진 길 안내 프린트 종이도 받을 수 있었는데, 밤에 가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각주:4]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 했다. 

 


 숙소에서 몽생미셸까진 자전거를 타고 1시간 -_-;이 걸린다. 엄청난 거리다. 나는 홀로 자전거를 타고 노르망디를 달렸다. 정말 주위에 아무 것도 없었다. 혼자서 소리를 질러도, 노래를 불러도 아무도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가운데에 브레꾸르 마뇨르[각주:5]를 연상케 하는 대 저택도 있었는데, 그 모습에 반해서 잠시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에 개가 컹컹 짖고 주인이 거기 누구냐며 소리를 질렀는데 이것이 진정한 유럽 농촌의 분위기구나 하며 감탄했다. 우리나라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스웨덴은 자전거 앞뒤로 야간 라이딩 시 반드시 라이트를 달아야 한다. 프랑스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다행히 빌린 자전거엔 라이트가 달려있어서 아주 간간히 만나는 차에 치이진 않았다.

한참을 가다보니 저 멀리 아주 조그맣게 몽생미셸이 보였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노르망디 평야 가운데에 홀로 서서 바라보는 몽생미셸의 불빛이란. 에밀리오 알바레스가 이런 느낌을 받았겠구나 싶었다. 


 자전거를 미친듯이 밟아 다가갔다. 최초로 보고서 실제로 가까이 가기까진 30분가량이 더 걸렸다. 몽생미셸이 매우 가까이 왔을 때 수많은 관광객들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모두들 나를 미친놈 쳐다보듯 했다. 하긴, 불 하나 없는 밤에 자전거타고 여길 오는건 정신나간 짓이긴 하다.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매우 많았는데 하나같이 빛에 반사되는 형광색 재킷을 걸치고 조심조심 밤길을 걷고 있었다. 다음날 확실히 알게된건데 일본인이 정말 많이 온다. 전체 관광객의 20~30%는 되보였다. 정말 많다. 정말. 일본인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일본인인척 "스게! 스게!"거리고 "스미마셍~ 헨나 바이꾸가 아리마쓰~" 이랬는데 "하이" 이런 대답을 들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불빛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별을 보았다. 정말 별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오리온의 벨트 밑 오리온 대성운 부분의 작은 별들도 보였다. 95년에 책으로만 보던 별자리를 처음으로 봤을 때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하교길에 친구들과 별을 보았다. 날씨가 맑다는 것의 기준은 플레이아데스 성단을 맨눈으로 볼 수 있냐 없냐로 스스로 정했는데, 노르망디의 밤하늘엔 성단뿐만 아니라 은하 그 자체가 펼쳐져 있었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전거를 세우고 한참이나 밤 하늘을 바라봤다. 베텔기우스가 곧 폭발해서 사라질거라는 뉴스를 본거 같은데, 팔 하나 잘린 오리온은 좀 웃길거 같다.
 
 몽생미셸은 성 오베르가 9세기 대천사 미카엘의 계시를 받아 건설한 수도원으로, 백년전쟁때는 수도원이 아니라 요새로써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18세기 대혁명을 거치면서 성직자계급이 모두 '박살'남에 따라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반혁명분자들을 수용하는 교도소가 되었다. 그래도 알카트레즈 수준은 아니었는지 19세기 빅토르 위고르를 위시로 한 낭만주의 작가들의 찬사를 통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를 낭만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동화속 모습이라면 정말 '관광지'인 이 곳 몽생미셸이 그런 환상을 실현해주는데 더 알맞다. 몽생미셸 수도원 주위 건물들은 모두 기념품가게와 고급레스토랑인데 레스토랑 음식 가격이 한화로 4만원,5만원정도 하니 가난한 여행객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그 나라의 옛 모습을 간직한 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노르망디가 참 마음에 들었다. 숙소로 돌아온 뒤 휴식을 취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것이다보니 방 위치가 아주 이상적으로, 내 방은 제일 고층이었다. 유럽 가옥들은 지붕이 삼각형이다보니 침대 부분 천장이 삼각형으로 관입되어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프랑스에서 별로 살고 싶지는 않은데, '여행지'로는 참 좋은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전에 얼마전 인터넷에서 본 프랑스의 리비아 사태 개입 관련 기사의 리플 하나가 떠올랐다. "병인년에 조선인을 학살한 것도 불란서 놈이요. 병인년에 조선일의 문화재를 침탈한 것도 불란서 놈이요. ~~~" 로 이어지는 리플이었는데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 리플 작성자는 19세기에서 타임머신 타고와서 두루마기 걸치고 키보드를 두드렸을까. 컨셉 한 번 웃겼다. 고전미를 살리기위한 '불란서'. 푸하하. 그리고 폴란드에 장기 출장간 아저씨의 블로그 포스트도 생각났다. 온돌을 사용하지 않는 폴란드인들의 무지를 욕하며 바닥에서 자기를 고집했다는 글이었는데 아마 지금쯤 입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내일 아침의 몽생미셸을 기약하며 잠에 들었다.



  1. 정부가 공인해주는 해적. 유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샤락 해적이었다. 정부 입장에선 나랏돈 안쓰고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니 이득이고, 해적 입장에선 안심하고 노략질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본문으로]
  2. 이 지역만 한 해 방문 관광객 수가 150만명이다. [본문으로]
  3. 17번 버스는 오전9시30분, 오후4시 30분 두차례밖에 없다. 역 바로 옆에 버스 정류장이 있기 때문에 단 번에 찾을 수 있다. [본문으로]
  4. 해지기 전에 가서 해질때까지 기다리는게 일반적이다. [본문으로]
  5. 1944년 오버로드 작전 격전지 중 하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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