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본 것 중 인상 깊은 것은 버려진 집들이었다. 창문이 없고 나무가 썩은 폐가가 여럿 있었는데 그 주위엔 색을 이쁘게 칠한 다른 집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집들의 문앞에 있는 눈이 전혀 치워지지 않은걸 봐선 사람이 지금은 살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아마 여름 별장일까? 모르겠다. 가기전 보았던 어느 블로그에선 이런 산에 지어진 집을 세금을 내기싫어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지은 집이라고 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그 블로거의 이야기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개드립'인지 깨닫게 되었다. 알아보지 않아서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생각엔 이 마을은 철저하게 구역화되어있고 주택들은 잘 감독되고 있는 듯 했다. 무슨 와일드 웨스트도 아니고. 

 가는 길에 본 이쁜 교회와 집. 보스에선 석조교회였지만 이 근처에선 목조교회이다. 내부도 분명 매우 작겠지. 
 

구드바겐에 도착한건 3시 30분정도였는데 기사가 다 와서 하는 말이 자기가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 올 때 쯤 생각해보니 겨울이라 페리가 더 이상 운행을 안할거란다. 미리 이야기해야되는데 확신이 안서서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 한다. 여름에는 페리가 5시이후로도 운행하는데 겨울이라 5시에 구드바겐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지막이고, 플롬으로 가는 것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내로 오슬로로 가야되는 나의 일정을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보스로 돌아가는 버스는 4시 40분 쯤에 있었는데 그 사이 시간을 잠시 구드바겐에서 보냈다. 


 구드바겐은 정말 산골짝 동네로 인구가 천 명도 안될 듯 싶었다. 역에서 읽은 관광 안내책자에는 인근 마을에 대한 정보들이 적혀있었는데, 인구가 말도 안되게 적은 곳들이 여럿 있었다. 구드바겐은 플롬으로 향하는 페리구간이 있는 곳으로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듯 했다. 갔을 때는 시즌이 비수기인지라 정말 아무도 없었다. 

 기프트샵도 문을 닫았고, 페리 선착장 대합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이 대단한 세계적인 관광지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란! 마음껏 소릴 질러도, 뭔 짓을 해도 아무도 볼 수 없다. 오히려 일정이 꼬여버린게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근처 집들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건축의 아름다움은 주변과의 조화, 양식의 통일에서 나온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인 이유 탓에 통일되지 못하고 뒤죽박죽의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정부에서 새마을운동 때 지붕개선 사업을 했던 것처럼 모두 한옥양식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좀 비현실적인 말이긴 하다. 혼자서 전통 한옥양식으로 지어진 주택들로 가득한 한국의 시골모습을 생각해보았다. 서양인들이 흔히 가지는 동양의 신비 라는 이미지에 딱 맞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버스를 기다리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차들이 몇대 지나간다. 이 협곡의 설원 위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이상했겠지. 인간의 정주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국을 떠날 때 방을 비우면서 느꼈던 감정이 정주욕이었나 보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가며 생각해보니 계속 방랑하는 삶도 여유만 있다면 당분간은 꽤 괜찮을거 같기도 했다. 그럼 애초에 방 뺄 일도 생기지 않을테고.


 버스는 안오고 해가 지기 시작해서 조금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밤이 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목욕탕 사우나가 생각나는 따뜻한 대합실이 있었기에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아스라히 산 너머를 쳐다보니 달이 보인다. 그 때 비행기 한 대가 비행운을 그리며 산위로 솟아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바보같았는데 그 때만큼은 그 장면이 정말 낭만적이라고 느꼈다.

 99년 2학기 개학 할 때가 생각난다. 내가 살던 곳은 지방 중소도시로 그 때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어린이는 유복한 가정의 자녀들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거의 다 부모님 중 한 분이 의사나 교수였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같은 반엔 소위 부자집 아들인 W가 있었는데 W와 나는 99년 4학년때 정말 자주 어울렸다. 같이 논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때 가장 유행이었던 구슬동자 장난감을 W는 거의 매주마다 하나씩 새로 샀기 때문이었다. 걔 집에 가면 온갖 특이한 구슬동자 로봇은 다 볼 수 있었다. 

 W에 대해 잠깐 더 이야기하자면 그의 집에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오만불손한 태도로 아주머니를 대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나라 음식은 못먹겠다며 유치한 투정을 부리던 모습도 생각난다. 

 어쨋든, 선생님은 W가 이번 여름에 유럽 4개국을 갔다왔다고 교실 앞에 불러내어 친구들에게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이야기하게 했다. 집에 있던 책으로만 다른 나라를 여행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W의 여행담은 걸작이었다.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기억은 자극의 강도가 셀 수록 선명해진다. 몇 안되는 4학년의 기억 중 하나가 그것이니 그 때 당시의 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W가 말하길, "그 곳 사람들은 머리색깔과 말이 달랐습니다." 이게 다였다. 당황한 선생님이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하자 "그 곳 피자는 맛이 없고 쓴 맛이 났습니다."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어찌나 한심해 보이던지. 아니, 어린 아이에게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건 무리겠지만 초등학생 수준에서 여행에서 느낀다는 것이 딱 저정도일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참 돈이 아깝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나서 정류장에서 혼자 깔깔 웃었다. 난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애초에 피오르드가 꼭 강(어디선가 보니 저게 강물이 아니라 바닷물이라던데. 근데 내지인걸 봐선 강이겠지.. 아니면 말고;) 물과 함께라야 피오르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관광책자 등에 꼭 저런 사진이 소개되는 이유는 아마 강과 어우러진 모습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페리가 끊겼다고 해서 0.5초 정도 실망했는데 선착장 주위에서도 볼 건 다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송네피오르드 투어 자체가 기차,버스,페리 등을 갈아타면서 하루 종일 이동하며 주위 자연을 구경하는 것이라 이미 입은 벌어질 대로 벌어진 후였다. 


 혼자서 사진을 찍고 타이머를 이용해서 열심히 놀고 있을 때 즈음 버스가 오고 있었다. 열심히 손을 흔들어 불러세웠다. 버스에 앉아 대각선 왼쪽 앞 승객을 보니 열심히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다. 폰을 열어보니 버스안에 와이파이가 된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보스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고, 숙소를 찾아야 했다. 이미 오슬로로 가는 기차는 없는 상황. 유스호스텔을 가니 스키타러 온 손님들로 만원이고 재즈가 흐르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F 호텔도 만점. 결국 그 건너편 호텔에서 덜덜 손을 떨며 숙박비를 지불했다. 여기서 노르웨이 물가를 소개하자면,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스웨덴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물가를 가지고 있는지 실감했다. 덴마크는 양반이었다. 단순히 환율상으로만 따지면 스웨덴 물가는 우리나라의 1.5~1.7배이고, 덴마크, 노르웨이는 우리나라의 두배이다. 평소에 이를 척도로 물가를 계산해왔는데 (왜냐면 스웨덴 물가가 우리나라 물건값에 0을 몇개 뺀거라서 그냥 환율공식대로 1.7배 해버리면 된다.) 노르웨이에 도착하고 나서 그게 바보같은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환율이 1.7배,2배라는 것과 물건 판매가격은 별개였다. 

 그냥 이해가 쉽게 예시를 들자면 스웨덴에선 500ml 코카콜라가 2천5백원정도인데 노르웨이에선 5천원이 넘어간다. 구닥다리 샌드위치가 2만원. 200ml짜리 초코우유가 6천원이다. 베르겐이나 보스에서 오슬로로 가는 5~6시간 가량 걸리는 기차 티케값은 학생할인을 안받은 일반 성인가격이 우리나라 돈으로 14만원가량이다. 그래서 3성 호텔 숙박비 20만원은 오히려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나라 호텔들도 10만원은 훌쩍 넘고 20만원 가량을 받으니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노르웨이가 전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라고 한다. 소득수준이 높은 자국민에겐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소득수준이 이곳 나라보다 못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치명타다. 교환을 스웨덴으로 쓴 걸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덴마크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물가이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보스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 9시에 출발하는 오슬로행 기차를 탔다. 가장 최저가격으로 달랬더니 패밀리석을 끊어줬길래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타자마자 이해가 갔다. 가족석 구간은 ADHD 장애를 앓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 될 정도로 과하게 활발한 각국의 아이들이 '날뛰고' 있어서 이어폰이 없었다면 아마 고통 속에 시달렸을 것 같다. 내 옆자리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리가 다 새어나오는 이어폰을 끼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음악이 멜스메나 데메 혹은 블메가 흘러나오는걸 봐선 아마 노르웨이인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오슬로에 도착했다. 오슬로의 날씨는 딱 돌아다니기 싫은 날씨였고, 이미 일정이 뒤틀려서 방문 예정이엇던 8~9곳 중 많아야 두 곳을 갈 수 있었다. 결국 선택한건 가까이 있는 뭉크 박물관이었다.


 에드워드 뭉크의 그림은 <절규>가 가장 유명하다. 다행히 그 작품은 이 박물관에 있었다. 60년대에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박물관은 규모가 작아서 대다수의 작품은 국립 미술관이나 다른 미술관에 흩어져있고 이곳 박물관에는 작품을 로테이션해 전시한다고 한다. 

 책에서 봤던 여러 작품들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는데 예술에 조예가 없던 탓에 '미학'의 관점에서의 접근은 전혀 불가능 했다. 인상깊었던 것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뭉크가 화가 뿐만 아니라 작가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뱀파이어였다. 십수년에 걸쳐 뭉크는 똑같은 구도의 그림을 여러번 그렸는데 제목이 뱀파이어였다. 여성이 남성을 안고 피를 빠는 모습. 왜 뭉크는 그 그림을 여러번 그렸을까? 오디오 안내라도 받을껄. 얼핏 본 기억으론 절규도 여러 점이 있다고 한다.

 관람객 중엔 중국인 중년 아저씨들도 있었는데 말은 하지 않아 중국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들이 중국인이 아니라면 나는 내 머리를 먹을 것이다. 중국인은 중국인처럼 생겼다. 그리고 한국패션을 하고 한국얼굴을 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한국여성도 두 명씩, 두 무리를 보았는데 가까이서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예상대로 한국 사람이었다. 한 쪽은 지하 물품보관소에서 봤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행자 카페등에서 만나 같이 여행하는거 같은데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있는 듯 했다. 역시 저럴 바에는 혼자 다니는 것이 낫다.

 오슬로는 솔직히 말해서 실망스러웠는데 그 이유는 오슬로에선 유럽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현대적이라 구경하는 즐거움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긴건 노르웨이인이 아닌 무어인과 중동 지역 출신 무슬림들이었다. 프랑스 파리가 무어인의 도시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슬로가 이렇게 무슬림들도 뒤덮혀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길거리에선 차도르,부르카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아랍계 이민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 보았다. 

 무어인은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다. 카스티야 왕국, 레콩키스타, 엘 시드 로드리고 디아즈, 알 함브라 궁전 같은 키워드들이 주르륵 이어지는 바로 그 무어인들 말이다.
 하지만 무어인하면 일반적이 사람들이라면 대개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를 떠올릴 것이다. 음, 근데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정확히 어느 지역 출신이 많지? 모르겠다. 

 아무튼, 과도한 이민자로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사회 분위기가 이민자에 적대적으로 변하고, 그것이 정치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한국을 떠나기 전에도 보았다. 룬드 바로 옆 말뫼는 인구의 1/3이 이민자인데 이민자를 상대로 한 총기 살인사건도 발생했다 한다. 이곳 북유럽 이민자들에게선 범죄라던가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 밤에 버거킹에서 봤던 10대 양아치들이나 보스의 노르웨이 스킨헤드 성님들이 위험하면 더 위험하지. 노르웨이 성님들의 "White power" 이야기는 이런 최근의 추세에 의한 것이 아닐까. 근데 북쪽에는 이민자들이 거의 없는데 왜 스킨헤드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청소년들의 치기인지.

 공항에서 기념품으로 이쁜 '구'를 샀다. 구 안에 바이킹 배가 있는 기념품이었다. 그리고 그림엽서(사진엽서?)도 5장 샀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_-; 많이 살 수 없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편지를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공간이 부족해져서 아쉬웠다.

노르웨이에서 다시 덴마크로, 그리고 스웨덴으로 2시간만에 주파한 나는 룬드 역에서 자전거를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타고 집으로 왔다. 룬드에 처음 왔을 때는 길을 잃어 헤맸는데 이제는 해외여행 갔다와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향한다. 경험만큼 큰 스승은 없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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