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본 것 중 인상 깊은 것은 버려진 집들이었다. 창문이 없고 나무가 썩은 폐가가 여럿 있었는데 그 주위엔 색을 이쁘게 칠한 다른 집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집들의 문앞에 있는 눈이 전혀 치워지지 않은걸 봐선 사람이 지금은 살지 않고 있는 듯 했다. 아마 여름 별장일까? 모르겠다. 가기전 보았던 어느 블로그에선 이런 산에 지어진 집을 세금을 내기싫어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지은 집이라고 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그 블로거의 이야기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개드립'인지 깨닫게 되었다. 알아보지 않아서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생각엔 이 마을은 철저하게 구역화되어있고 주택들은 잘 감독되고 있는 듯 했다. 무슨 와일드 웨스트도 아니고. 

 가는 길에 본 이쁜 교회와 집. 보스에선 석조교회였지만 이 근처에선 목조교회이다. 내부도 분명 매우 작겠지. 
 

구드바겐에 도착한건 3시 30분정도였는데 기사가 다 와서 하는 말이 자기가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 올 때 쯤 생각해보니 겨울이라 페리가 더 이상 운행을 안할거란다. 미리 이야기해야되는데 확신이 안서서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 한다. 여름에는 페리가 5시이후로도 운행하는데 겨울이라 5시에 구드바겐으로 돌아오는 것이 마지막이고, 플롬으로 가는 것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내로 오슬로로 가야되는 나의 일정을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보스로 돌아가는 버스는 4시 40분 쯤에 있었는데 그 사이 시간을 잠시 구드바겐에서 보냈다. 


 구드바겐은 정말 산골짝 동네로 인구가 천 명도 안될 듯 싶었다. 역에서 읽은 관광 안내책자에는 인근 마을에 대한 정보들이 적혀있었는데, 인구가 말도 안되게 적은 곳들이 여럿 있었다. 구드바겐은 플롬으로 향하는 페리구간이 있는 곳으로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듯 했다. 갔을 때는 시즌이 비수기인지라 정말 아무도 없었다. 

 기프트샵도 문을 닫았고, 페리 선착장 대합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이 대단한 세계적인 관광지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란! 마음껏 소릴 질러도, 뭔 짓을 해도 아무도 볼 수 없다. 오히려 일정이 꼬여버린게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근처 집들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건축의 아름다움은 주변과의 조화, 양식의 통일에서 나온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인 이유 탓에 통일되지 못하고 뒤죽박죽의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정부에서 새마을운동 때 지붕개선 사업을 했던 것처럼 모두 한옥양식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좀 비현실적인 말이긴 하다. 혼자서 전통 한옥양식으로 지어진 주택들로 가득한 한국의 시골모습을 생각해보았다. 서양인들이 흔히 가지는 동양의 신비 라는 이미지에 딱 맞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버스를 기다리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차들이 몇대 지나간다. 이 협곡의 설원 위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이상했겠지. 인간의 정주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국을 떠날 때 방을 비우면서 느꼈던 감정이 정주욕이었나 보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가며 생각해보니 계속 방랑하는 삶도 여유만 있다면 당분간은 꽤 괜찮을거 같기도 했다. 그럼 애초에 방 뺄 일도 생기지 않을테고.


 버스는 안오고 해가 지기 시작해서 조금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밤이 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목욕탕 사우나가 생각나는 따뜻한 대합실이 있었기에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아스라히 산 너머를 쳐다보니 달이 보인다. 그 때 비행기 한 대가 비행운을 그리며 산위로 솟아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바보같았는데 그 때만큼은 그 장면이 정말 낭만적이라고 느꼈다.

 99년 2학기 개학 할 때가 생각난다. 내가 살던 곳은 지방 중소도시로 그 때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어린이는 유복한 가정의 자녀들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거의 다 부모님 중 한 분이 의사나 교수였던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같은 반엔 소위 부자집 아들인 W가 있었는데 W와 나는 99년 4학년때 정말 자주 어울렸다. 같이 논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때 가장 유행이었던 구슬동자 장난감을 W는 거의 매주마다 하나씩 새로 샀기 때문이었다. 걔 집에 가면 온갖 특이한 구슬동자 로봇은 다 볼 수 있었다. 

 W에 대해 잠깐 더 이야기하자면 그의 집에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오만불손한 태도로 아주머니를 대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우리나라 음식은 못먹겠다며 유치한 투정을 부리던 모습도 생각난다. 

 어쨋든, 선생님은 W가 이번 여름에 유럽 4개국을 갔다왔다고 교실 앞에 불러내어 친구들에게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이야기하게 했다. 집에 있던 책으로만 다른 나라를 여행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W의 여행담은 걸작이었다. 난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기억은 자극의 강도가 셀 수록 선명해진다. 몇 안되는 4학년의 기억 중 하나가 그것이니 그 때 당시의 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W가 말하길, "그 곳 사람들은 머리색깔과 말이 달랐습니다." 이게 다였다. 당황한 선생님이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하자 "그 곳 피자는 맛이 없고 쓴 맛이 났습니다."라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어찌나 한심해 보이던지. 아니, 어린 아이에게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건 무리겠지만 초등학생 수준에서 여행에서 느낀다는 것이 딱 저정도일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참 돈이 아깝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나서 정류장에서 혼자 깔깔 웃었다. 난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애초에 피오르드가 꼭 강(어디선가 보니 저게 강물이 아니라 바닷물이라던데. 근데 내지인걸 봐선 강이겠지.. 아니면 말고;) 물과 함께라야 피오르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관광책자 등에 꼭 저런 사진이 소개되는 이유는 아마 강과 어우러진 모습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페리가 끊겼다고 해서 0.5초 정도 실망했는데 선착장 주위에서도 볼 건 다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송네피오르드 투어 자체가 기차,버스,페리 등을 갈아타면서 하루 종일 이동하며 주위 자연을 구경하는 것이라 이미 입은 벌어질 대로 벌어진 후였다. 


 혼자서 사진을 찍고 타이머를 이용해서 열심히 놀고 있을 때 즈음 버스가 오고 있었다. 열심히 손을 흔들어 불러세웠다. 버스에 앉아 대각선 왼쪽 앞 승객을 보니 열심히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다. 폰을 열어보니 버스안에 와이파이가 된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지만.


 보스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고, 숙소를 찾아야 했다. 이미 오슬로로 가는 기차는 없는 상황. 유스호스텔을 가니 스키타러 온 손님들로 만원이고 재즈가 흐르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F 호텔도 만점. 결국 그 건너편 호텔에서 덜덜 손을 떨며 숙박비를 지불했다. 여기서 노르웨이 물가를 소개하자면,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스웨덴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물가를 가지고 있는지 실감했다. 덴마크는 양반이었다. 단순히 환율상으로만 따지면 스웨덴 물가는 우리나라의 1.5~1.7배이고, 덴마크, 노르웨이는 우리나라의 두배이다. 평소에 이를 척도로 물가를 계산해왔는데 (왜냐면 스웨덴 물가가 우리나라 물건값에 0을 몇개 뺀거라서 그냥 환율공식대로 1.7배 해버리면 된다.) 노르웨이에 도착하고 나서 그게 바보같은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환율이 1.7배,2배라는 것과 물건 판매가격은 별개였다. 

 그냥 이해가 쉽게 예시를 들자면 스웨덴에선 500ml 코카콜라가 2천5백원정도인데 노르웨이에선 5천원이 넘어간다. 구닥다리 샌드위치가 2만원. 200ml짜리 초코우유가 6천원이다. 베르겐이나 보스에서 오슬로로 가는 5~6시간 가량 걸리는 기차 티케값은 학생할인을 안받은 일반 성인가격이 우리나라 돈으로 14만원가량이다. 그래서 3성 호텔 숙박비 20만원은 오히려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나라 호텔들도 10만원은 훌쩍 넘고 20만원 가량을 받으니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노르웨이가 전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라고 한다. 소득수준이 높은 자국민에겐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소득수준이 이곳 나라보다 못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치명타다. 교환을 스웨덴으로 쓴 걸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덴마크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물가이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보스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 9시에 출발하는 오슬로행 기차를 탔다. 가장 최저가격으로 달랬더니 패밀리석을 끊어줬길래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타자마자 이해가 갔다. 가족석 구간은 ADHD 장애를 앓고 있는게 아닐까 의심 될 정도로 과하게 활발한 각국의 아이들이 '날뛰고' 있어서 이어폰이 없었다면 아마 고통 속에 시달렸을 것 같다. 내 옆자리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리가 다 새어나오는 이어폰을 끼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음악이 멜스메나 데메 혹은 블메가 흘러나오는걸 봐선 아마 노르웨이인이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오슬로에 도착했다. 오슬로의 날씨는 딱 돌아다니기 싫은 날씨였고, 이미 일정이 뒤틀려서 방문 예정이엇던 8~9곳 중 많아야 두 곳을 갈 수 있었다. 결국 선택한건 가까이 있는 뭉크 박물관이었다.


 에드워드 뭉크의 그림은 <절규>가 가장 유명하다. 다행히 그 작품은 이 박물관에 있었다. 60년대에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박물관은 규모가 작아서 대다수의 작품은 국립 미술관이나 다른 미술관에 흩어져있고 이곳 박물관에는 작품을 로테이션해 전시한다고 한다. 

 책에서 봤던 여러 작품들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는데 예술에 조예가 없던 탓에 '미학'의 관점에서의 접근은 전혀 불가능 했다. 인상깊었던 것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뭉크가 화가 뿐만 아니라 작가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뱀파이어였다. 십수년에 걸쳐 뭉크는 똑같은 구도의 그림을 여러번 그렸는데 제목이 뱀파이어였다. 여성이 남성을 안고 피를 빠는 모습. 왜 뭉크는 그 그림을 여러번 그렸을까? 오디오 안내라도 받을껄. 얼핏 본 기억으론 절규도 여러 점이 있다고 한다.

 관람객 중엔 중국인 중년 아저씨들도 있었는데 말은 하지 않아 중국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들이 중국인이 아니라면 나는 내 머리를 먹을 것이다. 중국인은 중국인처럼 생겼다. 그리고 한국패션을 하고 한국얼굴을 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한국여성도 두 명씩, 두 무리를 보았는데 가까이서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예상대로 한국 사람이었다. 한 쪽은 지하 물품보관소에서 봤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행자 카페등에서 만나 같이 여행하는거 같은데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있는 듯 했다. 역시 저럴 바에는 혼자 다니는 것이 낫다.

 오슬로는 솔직히 말해서 실망스러웠는데 그 이유는 오슬로에선 유럽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현대적이라 구경하는 즐거움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긴건 노르웨이인이 아닌 무어인과 중동 지역 출신 무슬림들이었다. 프랑스 파리가 무어인의 도시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슬로가 이렇게 무슬림들도 뒤덮혀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길거리에선 차도르,부르카를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아랍계 이민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 보았다. 

 무어인은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이다. 카스티야 왕국, 레콩키스타, 엘 시드 로드리고 디아즈, 알 함브라 궁전 같은 키워드들이 주르륵 이어지는 바로 그 무어인들 말이다.
 하지만 무어인하면 일반적이 사람들이라면 대개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를 떠올릴 것이다. 음, 근데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정확히 어느 지역 출신이 많지? 모르겠다. 

 아무튼, 과도한 이민자로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사회 분위기가 이민자에 적대적으로 변하고, 그것이 정치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한국을 떠나기 전에도 보았다. 룬드 바로 옆 말뫼는 인구의 1/3이 이민자인데 이민자를 상대로 한 총기 살인사건도 발생했다 한다. 이곳 북유럽 이민자들에게선 범죄라던가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 밤에 버거킹에서 봤던 10대 양아치들이나 보스의 노르웨이 스킨헤드 성님들이 위험하면 더 위험하지. 노르웨이 성님들의 "White power" 이야기는 이런 최근의 추세에 의한 것이 아닐까. 근데 북쪽에는 이민자들이 거의 없는데 왜 스킨헤드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청소년들의 치기인지.

 공항에서 기념품으로 이쁜 '구'를 샀다. 구 안에 바이킹 배가 있는 기념품이었다. 그리고 그림엽서(사진엽서?)도 5장 샀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_-; 많이 살 수 없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편지를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공간이 부족해져서 아쉬웠다.

노르웨이에서 다시 덴마크로, 그리고 스웨덴으로 2시간만에 주파한 나는 룬드 역에서 자전거를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타고 집으로 왔다. 룬드에 처음 왔을 때는 길을 잃어 헤맸는데 이제는 해외여행 갔다와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향한다. 경험만큼 큰 스승은 없는거 같다. 

 

 



















 피오르드를 보러 겨울에 갈지 여름에 갈 지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나에겐 대항해시대와 모로윈드의 노드족 덕택에 노르웨이 = 겨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봄의 유럽은 이글스 네스트가 있기 때문에. 'ㅅ' =3 

 금요일 오후에 있었던 수업은 영화 수업이었는데 역시 예술은 나와 거리가 먼 듯 하다. 예술가의 선입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섬세한 터치와 우아한 목소리의 교수님은 수업내내 영상미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저 따분하게만 느껴졌다. 그나마! 대중적인 핀란드 영화 '과거없는 남자'는 분명 집에서 나 혼자서 직접 찾아봤다면 재미있었겠지만 이미 앞부분 수업에 질려버려서 별로 재미가 없었다. 

 집에서 어물쩡대다가 스웨덴을 떠나 덴마크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까지 한시간 가량 남았는데, 체크인부터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은 대개 셀프 체크인을 이용한다. 내가 이용한 노르웨이 항공은 예약번호만 입력하면 항공권이 발권되어 나왔는데, 예약번호만으로 발급이 가능한건 조금 문제가 있는거 아닐까 싶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악한 마음을 먹고 남의 항공권을 가져가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렇게 비생산적인 일을 할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 그래서 굳이 보안 장치를 마련해두지 않았나 보다.

 코펜하겐 공항 환전소에서 덴마크 돈을 모두 노르웨이 크로나로 바꿨다. 그렇게 비싸보이던 덴마크 크로나도 노르웨이 크로나 앞에선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노르웨이에 도착한 후에노르웨이 물가에 경악하기 위한 전초전이랄까.

 저가항공은 처음 이용해보았는데, 그냥 여타 항공 서비스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단지 기내식이 유료라는 정도? 단지 그것 뿐이었다. 약 80~90분간의 비행(아마도..) 끝에 베르겐에 도착했다. 베르겐의 첫 인상은 분명 스웨덴이나 덴마크와는 다른 고지대라는 것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산 굽이굽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내일 해가 떴을 때 분명 아름다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르켄 게스트하우스는 저가의 유스호스텔인데, 호스텔 이용이 처음인 나는 서비스의 질이 어느 정도일지 그저 궁금하기만 했다. 결과는 대 만족. 역시 소득수준이 나라는 저가라도 어느정도의 최저 급이란게 존재하는 듯 하다. 한 방에 4~6명 정도 자는걸 빼곤 시설은 매우 좋았다. 다만 비누가 없었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가져간 비누가 요긴하게 쓰였고, 샴푸도 있긴 있었는데 과연 공용 샴푸였을까 다른 사람의 샴푸였을까.. 확신이 안섰다. 샴푸는 있는데 비누가 없는건 또 이상하고. 어쨋든 편하게 하룻 밤을 보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냥 대략적인 일정만을 가지고 출바했던 나는 아침 9시가 조금 못되어 기차역에 도착했는데 보스로 향하는 기차가 10시 28분이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어느 후기에선 8시라고 했던 기억이 났는데, 뭐 그냥 조금 늦게 가게 된느거겠지.. 하고 말았다.

 분명 도시 어딘가에 전망대가 있을텐데 그냥 대충 아무 고지나 찾아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은 흡사 안암동을 연상케 했지만 건축 양식이 통일되어 약간은 우아한 멋을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저분하다'라는 느낌의 안암동과는 달랐다. 아아... 올해도 안암동3가 오거리슈퍼 주민들은 자기 마당 청소만 할 것인가. 'ㅅ' =3 아무튼.. 

 높은 곳에서 바라본 베르겐은 아름다웠다. 눈이 안녹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눈 없는 겨울은 황량하니까. 고개를 동쪽으로 돌려보니 항구와 배들이 보였는데 왠지 친숙한 이 느낌은 뭘까... 아아.. 베르겐에 16세기에 자주 방문했던거 같은 그런 기분 'ㅅ' 게임 중독인가보다.

 
 근처 집의 건축 양식을 유심히 보았다. 나무로 되어 있었다. 노르웨이의 건축 양식은 덴마크나 스웨덴처럼 우아한 멋은 없지만 단조로움에서 오는 색다른 멋이 있다. 기본적으로 지붕을 제외한 벽면 전체를 단일 색으로 칠한다. 녹색,노란색,빨간색,흰색 등등.. 그리고 창문틀을 벽면 색에 어울리는 색으로 다시 칠한다. 깔끔하면서도 색의 조화가 어우러져 정말 아름답다. 
 

 구드바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노르웨이 청년에게 노르웨이 가옥이 나무로 되어있는지 물어보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한참이나 집들은 살펴보았는데, 왜냐면 아직도 목조가옥에서 산다는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석회로 만들고 겉면에 그냥 나무를 덧댄건 아닐까? 나무가 아니라 나무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아닐까? 여러 의구심이 들었는데 노르웨이 사람이 나무라고 하니 그렇게 믿어야 겠다. 앞서 이야기하지만 이런 노르웨이 전통 건축 양식은 (만들어진 전통일지도 모르겠다. 근대의 산물일지도.) 오슬로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슬로는 대다수 건물이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어서 딱히 유럽스러운 느낌은 나지 않았고, 아파트가 그나마 전통 양식을 계승했는데, 나무가 석회로 변하고 색칠은 그대로이니 뭐랄까, 단조로운데 멋은 덜 하다랄까. 사진을 찍지 않은게 후회된다.
   


 기차는 한 시간을 달려 보스(Voss)에 도착했다. 보스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그야말로 설원이었다. 딱히 피오르드는 여기부터다! 라고 정해진 것이 없든 이곳 주변의 기기묘묘한 풍경이 온 도시를 휘감고 있었다.


 이곳에선 유럽에 온 이후 몇 안되는 살을 애는 추위를 느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지형의 높이도 모르고 원래 무슨 땅인지 알 수도 없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 발이 젖어버렸다. 기차역 대합실에 들어와 양말을 갈아신는데 동상에 걸리는 아픔이 이런건가 싶었다. 위 사진에 뿌연 안개같은 것이 있는데 눈발이 휘날려서 생기는건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것이 분명 구체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는 연기 비슷한 것인데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이라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설원 한 복판에 공간이 있길래 가까이 가보니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였다. 그곳의 벽면에 칠해진 낙서를 훑어보다가 다급히 여분의 속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는 농담이고 바로 이곳은 스킨헤드 성님들;의 아지트였던 것이다. 추운 겨울밤 이곳에서 노르웨이 스킨헤드 성님들은 마약도 하고 그래피티 예술(..)도 손보이며 White power를 주창했던 것이다. 가끔 정령신앙축제도 벌이고 동양인 납치해서 스너프 필름도 만들고 그랬겠지. 아아.. 사탄 숭배,트롤,블랙메탈,스킨헤드,끝없는 설원.. 역시 음침한 노르웨이 다웠다. 


 이곳에서 진정한의 의미의 설송(雪松)을 보았다. 아니, 소나무는 아니구나. 눈꽃으로 정정해야 함이 옳겠다. 우리나라에도 눈꽃열차같은게 있다고 하는데, 국내 여행을 거의 다니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런 세세한 가지 하나하나가 눈으로 장식된 나무는 생전 처음 보았다.  그 아름다움이 어찌나 탁월한지 마치 중학교 시절 방학 독후감과제로 나온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속 프랙탈이론을 다시 읽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봄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길임을 확신했다. 햇살은 따스하지만 눈은 녹지 않는다. 


 이곳의 눈은 내가 겪었던 눈과는 달랐는데, 무엇이 다른가 하니 눈을 밟았을때 발자욱이 그대로 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눈이 서걱서걱 부서지면서 자욱이 생긴다. 아마 날씨가 더 추워서 좀 더 꽁꽁 얼었기 때문일까? 날씨가 한국만큼이나 추워서 사진을 찍다보니 볼과 코가 술에 취한 사람마다 새빨개져 있었다. 장갑은 어찌나 방한기능이 안좋은지, 이정도 날씨 속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무잎,가지 하나하나가 얼어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바닥에 솟아있는 돌드은 다름아닌 묘지 비석이다. 

 눈이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지 알 수 있는 사진. 못해도 70cm는 쌓여있었다.


 보스의 교회. 교회내부를 구경하려 했지만 문이 걸려있었다. 룬드 대성당은 항상 열려있던데(그랬던가? 'ㅅ';)


 이곳은 스키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겨울에도 시끌시끌하다. 


 밤에 돌아다니면 유령이라도 나올까? 


 보스에 도착한건 정오 쯤이었지만 구드바겐으로 가는 버스는 2시 30분에 있었다. 버스 승객은 나와 노르웨이 청년 하나. 버스 기사가 나에게 피오르드 보러 가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페리가 다섯시 쯤에 올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버스는 출발했고 그것은 예상치 못한 여행의 시작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마르켄에서 8시쯤에 기상한게 시작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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