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가장한 4월 14일 목요일 이야기.
역시나 날씨는 흐렸고, 해야할 일은 많았다. 비극적인 14일은 블랙데이, 고스트투어날,미디어처리 2차텀 마감날, 웹개발알바 중간마감날,학교 후배 여친 생일날-_-; 등등.. 여러가지로 뒤범벅되어있었는데, 가장 중요한건 텀인지라 아침부터 텀을 시작했다.
텀 제안서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교수님 표현에 따르면 제안서는 정말 clear하다는데, 이렇게 unclear한 제안서는 처음봤다. 심지어 무슨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되는지도 파악이 안되는 수준. 점심을 pc실 밖에서 대충 쳐묵쳐묵하고 교수님 방에 가서 또 질문하고 다시 텀을 했다. 코드는 점점 더러워지고 더이상 뭐가 뭔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는데 시간은 어느새 흘러 4시 30분. 고스트 투어를 가야할 시간이었다.
고스트 투어는 룬드에 숨겨진 기괴하고 끔찍한 비화들을 들려주는 투어인데, 성당에 밤에 있으면 오르간이 저절로 연주된다던가, 누구 발소리가 들린다던가 하는 6살짜리 꼬마나 믿을 멍멍이 소리부터 룬드의 중세시대에 있었던 피의 사건들까지 아우르는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투어였다.
출발하기전에 서성이다가 알게됐는데 같이 투어관람하게된 여자애가 사실 파티에서 만났던 사람이자 우리 아파트 사는 사람이고, 심지어 같은 수업도 듣는 사람이었다. 근데 왜 난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지. 안면인식장애인가;;
투어할 즈음엔 날짜가 괜찮아져서 사진도 이쁘게 나왔다. 룬드 대성당은 11세기에 지어졌는데 전설에 의하면 트롤이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안에 가면 트롤상도 있다. 이 성당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게 성당 뒤편 벽이 전면부와 다르게 그을려있는 이유다. 그 이유는 대화재가 예전에 발생해 벽 일부가 불에 탔기 때문. 성당의 가장 오래된 부분을 자세히 보면 사용된 돌 종류가 다르다는걸 알 수 있다. 초기 성당은 사암으로 지었기 때문이라는데, 정말 약간은 셰일느낌의 사암으로 되어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망치와 정으로 열심히 두드리면 금방 구멍이 뚫릴듯.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건 시간표에 얽힌 이야기였다. 룬드 대학교 수업 시간표는 10시~12시같이 2시간 단위로 되어있는데 사실 수업시작시간은 10시 15분이다. 왜 시간표엔 10시라고 해놓고 시작은 15분에 하냐면, 옛날 학생들은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가는 길에 반드시 지나쳐야하는 성당 종소리가 자신이 집에서 떠난지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는 시계였다고 한다. 이 종소리를 듣고 수업 시작이 15분 남았으니 좀 서둘러야겠구나.. 뭐 이랬다는 이야기. 나같은 경우엔 자전거타고 지나가면서 휴대폰시계를 꺼내볼 수 없어서 성당 종소리에 많이 의지했었다.
난 왜 저것도 못봤을까 ㅋㅋ 매일 지나다닌 길인데. 저 뒤 돌에 새겨진 남자. 돌을 뚫는 남자? 돌을 부수는 남자?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저런게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이 옆엔 고대 바이킹 무덤도 있는데 무덤 주위에 룬스톤이 여러개 있다. 판타지게임에서나 보던 룬스톤이 학생회관 바로 앞에 있다니. 근데 가이드 말로는 사실은 바이킹 무덤이 아니라 쥐무덤이란다. 학생들이 때려잡은 쥐 시체를 넣어놨다나 뭐라나.
저 집 앞쪽 골목에서 학생이 다른 학생을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엔 학교내에 법정도 있고 교도소도 있고 사형장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문제가 시체가 학교와 도시의 경계에 있어서 어느 관할인지를 두고 한참 시끄러웠는데, 결국 범인은 잡혔고 어찌어찌해서 학교 법원 관할로 사건이 넘어가서 학교 사형장에서 사형당했다. 학교 자체 법정이 있을정도면 1700년대 쯤 일이려나. 이 살인사건으로 저 집은 The house of sin으로 불렸는데 가장 윗쪽 꼭대기 방에 사는 학생은 The highest sinner라고 불렸단다.
몇 번 언급했던 철학과 건물. 실제 이름은 kungshuset으로 왕의 집이라는 뜻. 덴마크 국왕와 룬드 대주교와 관련된 일화와 있었는데 잊어버렸다. 아.. 역시 일기는 그날 바로바로 써야되는듯.
룬드는 알고보니 피의 역사로 가득찬 곳이었는데, 두 창문 사이 벽이 다른 부분과 달리 부서진 곳을 보수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중세시대에 전투를 하다가 박살이 나서 그렇단다. 룬드 대주교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군대도 보유했단다. 룬드 대성당 주위는 일종의 요새였다. 그래서 룬드 성당 뒤쪽 뜰에선 수많은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고, 효수가 행해지던 곳이기도 했다. 이 도시엔 아직도 중세시대의 흔적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다. 다른 예로 룬드 중앙광장은 광장(Square)이 아니다. 사각형이 아닌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건 11세기 스타일의 광장이라 한다. 다른 유럽 도시들도 그렇겠지만, 이곳도 그렇고, 꽤나 부러운 점 하나는 오래된 건물들이 참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게 부러운 이유는 그렇게 오래된 건물들이 관광지나, 보존을 위해 출입이 금지된게 아니라 아직도 상업공간,주거공간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1세기면 십자군 전쟁도 일어나기 전인데 이 때 지어진 건물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스웨덴 꼬마애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건 성당과 마찬가지로 매일 지겹게 지나다니던 성당 뒷골목 가구가게 옆집이 룬드 대주교(아크비숍) 집무실이었다는 사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가던 곳이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찬 곳이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투어가 끝나고 텀을 마감하기 위해 다시 학교로 가야했다. 집에 갈 수 없어서 케밥가게에서 식사를 했다. 오래산 프로페셔널 -_-; 룬드 시민인양 뜻 모를 케밥 요리를 스웨덴어로 자연스럽게 달라했더니 키클링(닭)이냐 ??? 냐 묻는데 뒷 단어를 몰라서 온지 얼마안된 외국인인게 들통났다;; 케밥하면 소고기나 양고기로 통일인줄 알았는데 닭고기도 있었다. 맛은 뭐.. 갈릭소스빨; 집에서도 쉽게 요리 할 수 있을거 같다.
아무도 남지 않은 학교로 다시 가서 텀을 했다. 텀이 끝난건 새벽 두시. 데이빗이 보고서를 끝내고 교수님에게 메일까지 보내고나자 온 몸에 힘이 쫙 풀리면서 피로가 밀려왔다. 지상으로 올라와 문을 나서니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엄청난' 안개가 나를 맞이했다. 이 신비로운 자연 현상 보려고 그렇게 고생을 했나.
역시 교환학생은 어디까지나 관광객이 아니라 학생이다보니 공부하면서 재미를 느껴야 제맛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