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밤엔 비가 많이 왔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던 그 날 밤에 모든 정리를 끝내고 이것저것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밖이 번쩍하고 빛나기 시작했다. 부화절 12시에 온 도시가 종소리와 폭죽소리로 뒤덮힌 것이 기억나 창문을 열어봤다. 부활절의 그 날 밤엔 번쩍거리는 불빛과 대공포탄 터지는 소리같은 불꽃놀이 소리에 웃을 수 있었지만, 이번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천둥번개 소리였다. 남쪽 하늘이 정말 '끝내주게' 흔들리는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걸 보니 곧 이곳에도 닥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6시간 후에 짐을 끌고 역까지 가야되는데 비가 오는 모습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빗방울이 얼마나 굵고 거센지 온 동네가 다 쓸려나가는줄 알았다. 

 4시경에 일어나 밖을 보니[각주:1] 비가 온 흔적은 약간의 냉기뿐이고, 그 어디에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나서기 전에 슬리퍼를 버리러 쓰레기장에 갔는데 귀찮아서 문을 안잠그고 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아파트 현관을 열려면 열쇠가 있어야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이 새벽에 세상에. 몇 십분을 밖에서 허비하다가 마침 지나가는 동네 청년 하나를 붙잡으니 다행히 내가 사는 곳의 출입코드[각주:2]를 알고 있어서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진짜 고생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는데 짐이 약 40kg정도됐다. 이걸 역까지 옮겨야되는데, 이민가방이 옛날것이라 그런지 바퀴가 작아서 사실상 바퀴가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클로스터가든을 벗어나 중앙광장 근처까지 가는데 땀에 젖은 오징어가 된 줄 알았다. 넉넉잡아 1시간을 예상했는데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1시간 안에 이동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서 지나가던 택시를 붙잡았다. 

 택시를 타고 기차역 근처 spoletop[각주:3]의 아파트 열쇠 반납함에 갔는데 급히 넣는다는게 손이 반납함 구멍에 걸려서 오른쪽 중지 손톱 절반이 찢어졌다. 출혈이 어찌나 심한지 이러다가 쇼크로 기절하는거 아닌가하는 엄살에 가까운 생각도 해봤다. 우역곡절 끝에 기차를 타서 공항에 도착하니 7시 20분. 비행시간이 8시 25분이니 늦었다. 

 설상가상으로 체크인을 하는데 줄이 얼마나 긴지 도저히 제 시간에 체크인을 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안들어서 공항 직원한테 물어보니 티켓을 새로 사란다.. 아.. 덴마크.. 어쩜 그리도 무책임할 수가. 정말 당황해서 어떻게 해냐 물으니 자기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단다. 멍청한 덴마크놈들, 그러니까 스코네[각주:4]를 뺏기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쫓겨났지. -_- 

 체크인을 겨우하고 보안검색대를 가는데, 세상에.. 보안검색대 줄이 500m는 된다..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각주:5]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입국장에 들어서자마자 파이널콜[각주:6]이 울렸다. 죽어라고 뛰었다. 겨우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탑승해서 네덜란드로 향했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의 인천행 대한항공 비행기 게이트쪽으로 가니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아, 한국어! 스웨덴에서 한국 사람과 이야기한게 다 합쳐서 30은 될까? 영어와 스웨덴어만 하고 살았는데.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대한항공 비행기 시설은 얼마나 감동적인지, 전면에 있는 HD화질의 스크린을 통해 수십가지의 영상물을 골라 볼 수 있었다. 음악도 앨범 째로 수십개가 들어가있고. 진짜 과학문명화의 최첨단을 달리는 우리나라다. 덕분에 비행시간 10시간동안 단 한번도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만 주구장창 봤는데 내가 좋아하는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영광의 깃발'과 '가을의 전설'[각주:7]이 고전영화란에 있길래 다시 봤다. 정말 '폭풍감동' ㅠ_ㅠ 

 직원들은 얼마나 친절한지 뭔가 부탁을 자주해도 항상 웃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외국 비행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친절함이다. 나중에 또 외국에 장거리로 나가게 될때면, 가격이 크게 차이가 안난다면 국적기를 타야겠다고 느꼈다. 

 내가 한국에 돌아왔다고 느낀건 착륙 20분 전쯤이었는데, 기장이 착륙까지 20분이 남았다고 하자 몇몇 아줌마 아저씨들이 일어나서 주섬주섬 짐을 위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자판기에서 커피 뽑을 때 종이컵에 손대고 미리 기다리는거랑 똑같은 이치 아닐까. 이것도 한국 문화라면 문화겠지. 

 수화물을 찾는데 내 이민가방이 안나왔다. 안내데스크로 오란다. 가보니 네덜란드에서 내 짐이 안실려서 그 다음비행기로 오고있는데 택배로 보내준단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데 솔직히 고마웠다; 어차피 그거 들고 고향내려가야되는데 공짜로 택배를 보내준다니. 하아.. 고객만족 서비스 대한항공 위엄;;

 청량리에서 고향가는 기차에선 알람을 도착시간에 맞춰보고 타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중간에 정말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시체처럼 잤다. 집에 돌아오니 낯설기보다는 그냥 어제도 여기 있었던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 한번도 외국에 나가지 않은것처럼. 

 시내에 자전거 타고 나갔다.  고맙다는 말을 해도 대꾸도 안하는 불친절한 자전거가게 아저씨, 인도위에 당당하게 주차해있는 SUV, 아무도 찾지않는 재래시장에서 농사지은 작물을 파는 할머니들과 죽어버린 지역경제까지. 아, 나는 돌아왔다.
 
  1. 여름이라 해가 4시에 이미 떠있다. [본문으로]
  2.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열쇠로 문을 열거나 출입코드를 입력해야되는데 학생들에게는 출입코드를 안알려줘서 몰랐다. [본문으로]
  3. ; 내가 안살아서 철자를 정확히 모르겠다. [본문으로]
  4. 말뫼,룬드가 속해있는 스웨덴 최남단 주(州). [본문으로]
  5. 지금 생각해보니 별거 아닌거 같은데 그 당시엔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본문으로]
  6. 비행기 이륙전 마지막 탑승 촉구 메시지 [본문으로]
  7. 브래드 피트가 멋있게 나오는 영화. -_-;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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