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딘버러 여행은 전혀 계획안하고 갔는데, 뭐 대충 내려보니 어딜 가야될지 보이는거 같아서 그랬다. 실제로, Wavely bridge 주위 The royal mile(로열 마일) 주위에 관광 명소가 몰려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로 스코틀랜드 왕국[각주:1] 시절의 왕,왕족들 그리고 수 많은 스코틀랜드의 유명 작가,과학자,예술가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있다. 참고로 영국의 모든 국립 박물관은 무료다. 입구에 기부금 받는 공간이 있을뿐. 참 좋은 곳이다. 아무튼, 내부는 고전시대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정말 고고하고 도도한 인테리어로 되어 있는데 유럽이나 엔틱 가구,인테리어에 환상이나 허영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오면 기절할듯..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나온다.

 실제 역사나 실화를 다룬 영화가, 배경지식이 있으면 더 재미있듯이[각주:2] 갤러리도 그렇다. 특히 이 초상화 갤러리의 경우 영국 정치사나 영국 유명 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가기전에 여행지에 대한 책 한 권 읽어보고 가는건 어떨까?

 스코틀랜드 역사는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게 그렇게 잉글랜드와 치고박고 싸웠다가 결국에는 스코틀랜드 왕이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하나가 되었는데, 이렇게 보면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한테 흡수당한 것이다. 근데 왕이 잉글랜드에 계속 머물고 왕국의 중심도 잉글랜드에서 돌아가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게도 왠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한테 흡수당한거 같은 묘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_-; "이겼는데 왠지 진 기분이야.." 뭐 이런 느낌? ㅋㅋ

 초상화들 중 몇 점들은 정말 입벌어지게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해서 한참 떨어져서 봐야 전체를 볼 수 있을 정도인데, 하나같이 참 '고귀하다'는 느낌을 준다. 귀족,왕족들을 그렸기 때문에 당연한 거겠지만. 전혀 생각치도 못한 몇몇 인물들이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문을 나섰는데 이래서 사람들이 영국,영국 하나 싶었다. 

 
 에딘버러성으로 가는 길엔 온갖 기념품 가게와 신기한 가게들이 즐비했는데 스코틀랜드의 전통인 체크무늬 킬트 방직공장을 재현해놓은 거대한 지하 매장도 있다. 킬트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은 전통인데 19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만들어진 전통이다. 근데 저런 근대에 만들어진 전통을 세계화해서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을 끌여들이고 방직업의 중심지로 만든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안나온다. 


 Flat cap, Irish cap, 우리나라에선 헌팅캡으로 불리는 위 사진 속의 모자 태생이 아일랜드,스코틀랜드인데 이 곳에서 오리지날 메이드 인 브리튼 플랫캡을 구입할 수 있다. 하아 촉감하며 디자인하며.. 가격은 최저 22~35파운드까지 천차만별. 기념품 가게들이 취급하는 품목은 거의 다 같은데 가격은 다 다르다. 대다수 가게는 25파운드에 파는데 나는 22파운드에 사는 가게를 찾아 구매했다. 3파운드면 거의 6천원 가량하는 엄청난 돈이다. 

 짐이 보따리 하나밖에 없었는데 플랫캡 쓰고 거울을 보니 갓 뉴욕으로 이민 온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같아 보였다. 그러니까 거지꼴 -_-; 이었다. 상의랑 하의는 21세기 디자인인데 모자만 19세기~20세기 초반에 머물러있으니 얼마나 웃긴지.

 


 기념품 가게에서 내 눈에 띈 윌리엄 월레스 모형. 옆엔 19세기 하이랜드 연대 군악대병 모형도 있었는데 오히려 진짜 스코틀랜드 역사라면 이쪽이 더 가까운거 같아 샀다. 비록 모양은 다분히 브레이브 하트의 멜 깁슨에서 따왔지만...그리고 그리운 사람들에게 쓸 엽서도 몇 장 샀다. 교환학생와서 엽서값으로 몇만원 쓴듯; 한 번 보내는데 2000정도 든다. 엽서 가격 포함하면 3천원? ㅋㅋ 

 스코틀랜드 샵 이라는 이름의 기념품 가게의 웃긴 점은 주인이 중동 출신 무슬림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사회에 융화되기 앉고 터번(사용하기 편하게 모자형으로 아예 고정되어있더라 ㅋㅋㅋ 개량 터번 ㅋㅋㅋ)쓰고 있다..  얼마나 웃긴가.. 무슬림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것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전통입니다. ^_^" 이러는게 -_-;
  


 영국은 박물관 입장은 무료지만 성 입장은 유료다. 정말 별 볼일 없는 자그마한 성도 유료다. 이미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중세시대 성의 위엄을 느껴봤기 때문에 입구까지만 들어가진 더 가진 않았다. 빈곤한 여행자에게 저런건 사치. 
 


 에딘버러 로열 마일은 올드 타운이고, 웨이블리 다리 너머는 신시가지라서 현대식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아니.. 현대식은 아니고 19세기.. -_-; 누구 말마따나 유럽은 근대 이전에 시간이 멈춰있고, 미국은 근대에 시간이 멈춰있고, 한국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나..
 


 딱 여기까지. ㅋㅋ 그대로 뒤도 안돌아보고 나왔다. 
 



 저기 보이는 평평한 언덕(돌로 된 부분)은 Arthur's seat이라 불리는데 아더왕이 앉아있는 곳이라서 그런데 불린다나 뭐라나. 한 번 가고 싶었는데 하이랜드 고지대를 누비고 나니 다리가 부서질거 같아서 포기했다. 다리 문제도 있지만 이미 고지대에서 걸으면서, 기차타고 가면서 본 엄청난 풍경들을 넘치도록 봤기 때문에 저 정도 언덕은 별로 안땡겼다. 


 나오는길에 보니 해자가 있었다. 옛날에는 이 공간이 온갖 오물이 섞인 물로 가득차 있었겠지.. 해자가 있는 이 성을 뚫을 방법은 정문 공격밖에 없어보였다. 그나마도 다리를 올려버릴 수 있기 때문에 천연요새 아니었을까. 뒤쪽은 절벽이라 절벽을 타고 올라 올 수도 없고.



 성 근처엔 재미있는 상점들이 많다. 이 가게는 Camera Obscura 일루젼숍인데 착시현상을 이용한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가령 모나리자 그림을 왼쪽에서 보면 웃고있는데 오른쪽에서 보면 사탄 -_-;으로 변한다던가. 제일 인상깊었던건 3D 저스틴 비버 브로마이드 -_-;;
마의 16세를 맞이하여 역변의 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 최고 아이돌의 열기가 스코틀랜드까지 오다니.. 대단하다.  


 바로 옆에 있는 스카치 위스키숍. 직접 마실 수 있고 역사도 알 수 있고 쇼핑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료라서 GG. 딱히 술을 사랑하는 편이 아니라서 별로 안끌렸다. 
 


 관광할 때 발품팔아 다니는게 싫으면 투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영국에선 거의 모든 버스가 2층버스인데 관광버스의 경우는 저렇게 2층이 개방형이다. 에딘버러의 경우 모든 투어버스 집결지는 웨이브리 다리에 있고 10파운드? 17파운드? 정도 되는 금액을 내면 24시간 내내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버스 안에서는 가이드가 안내도 해준다. 나는 비루한 방랑자라 가격보고 그냥 포기했다. 
 


 유럽 건축의 특징은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있다는건데, 분명히 따로 지었는데 완전히 붙어있다. 그래서 Street, Block단위로 길 찾기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새 주소 체계도 이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건물 지어진게 강남처럼 계획된 개발구역이면 상관없지만 시골촌동네로 갈수록 그냥 '막지은' 곳들이 많아서 제대로 정착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나라나 미국 대도시같이 '현대적인' 곳들은 상업지구는 1층부터 꼭대기까지 100% 상업지구이지만 유럽은 1층만 상업지구고 그 위에는 주거 공간이다. 위 사진을 보면 1층만 상점이고 위에는 그냥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건물들은 대개 18세기나 19세기에 지어진 것들이 많고 구시가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내부 구조, 장 단점에 대해선 잉글랜드 여행할 때 확실히 알게 되었고, 잉글랜드 여행기에서 좀 더 적을 예정이다. 
 

 
 대성당? 교회?. 스테인드 글라스가 멋지다. 그런데 내부 사진 촬영하려면 포토 퍼밋으로 2파운드나 내야된다. 당연히 사진 안찍었다. -_-; 남들은 그냥 지나갔겠지만 나는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추모판(?)에 주목했다. 대영제국 시기 전 세계에서 목숨을 잃은 수 많은 하이랜드 병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있는데 영국이 치른 전쟁이 워낙 많다보니 판들이 많아서 어떻게 보면 교회 벽 전체가 좀 지저분하게 뒤덮혀있다는 느낌도 든다.
 


  에딘버러 구시가지 중 로열 마일은 현지인은 없고 관광객만 있다고 보면 되고, 구시가지의 그 외 지역에는 관광객 반, 현지인 반이다. 진짜 에딘버러를 보려면 신시가지로 나가야된다.
 


 웨이브리 브릿지인가 노스 브릿지인가 기억은 안나지만 로열 마일 방향을 향해 찍은 사진.
 


 에딘버러 성 말고 다른 성 하나가 더 있는데, 이름을 까먹었다. 근데 이 사진 그 성 사진이 맞긴 한가.. -_-;
 


 교차로에 있는 웰링턴 동상. 이 웰링턴이 내가 아는 웰링턴 공작이 맞는지 모르겠다. 웰링턴 공작 아서 웨슬리는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전쟁인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무너뜨린 인물이다. 이 공으로 웰링턴 공작 칭호를 얻으며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스코틀랜드의 상징, 킬트와 백파이프. 이곳에서 겪은 최고의 모순은 다름아닌, 이 백파이프 연주하는 할아버지가 별로 주목을 못받았다는 것이다. 관광지들이 힐끔 쳐다만 보고 그냥 지나친다. Scotland the brave 같은 연주곡은 유투브에서 찾아서 막 듣고 그러지 않나; 그런데 잉글랜드 런던에서 백파이프 연주하는 사람을 봤는데 사람들 완전 열광했다.  정작 진짜 스코틀랜드 사람이 스코틀랜드에서 연주하는 백파이프는 외면받고 잉글랜드에서 잉글랜드사람인지 웨일즈 사람인지 모를 이가 연주하는 연주는 환호받는다는게 좀 이상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정자세를 취해주셨다. ㅠ_ㅠ
 


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 미술에 조예가 깊은 편이 아니라 일부 관만 보고 나왔다. 미술은 가장 고귀한 쾌락중 하나라고 하는데, 난 그걸 이해할 만한 수준의 인간은 못되는거 같다.
 


 에딘버러성 뒤쪽에서 찍은 성. 참 자리 잘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한글 영애겠지? 하아.. 한국인들 민도 좀 보소 ㅡㅡ 쯧쯧. 
 여긴 진짜 현대 스코틀랜드가 아니야! 하면서 신시가지 탐험에 나서면서 결국 하이랜드에서와 마찬가지로 걷고 또 걷는 대장정 -_- 이 시작됐다. 그런데 정말 웃긴 장면을 봤다. 하이랜드에서 중국인 소리 들으면서 느낀거지만 확실히 이 곳 사람들의 자존감? 텃세같은게 센거 같았는데 한 에피소드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됐다. 인도 위로 어떤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는걸 경찰이 불러 세웠다. 그러더니 "Where are you from?" 하고 묻자 여자가 뭐라 대답했다. 그러자 경찰이 큰소리로 "England???? This is SCOTLAND!!!!!!!!!!!!!"하고 소리치는게 아닌가. ㅋㅋㅋ 그러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자전거는 여기로 다니지 않는다며 잉글랜드 놈들은 정말 이해가 안간다느니 하며 완전 무안을 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여자보고 주의하라면서 그냥 보냈는데 여자를 향해 FREEDOM!!![각주:3] 이라고 외치지 않은게 다행;;;

 신시가지는 관광지와 달리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노천 까페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했다.  한시간 정도 걷고나서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에 갔다. 사진 찍었는데 어디로 날아갔는지 안보인다..아무튼, 반드시 가봐야할 장소. 

 스코틀랜드의 선사시대 부터 현재까지 '모든것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인상깊었던건 역시나 중세시대. 스코틀랜드 전통검이 양손검 클레이모어를 봤는데, 정말 강인한 전사가 아니면 들고 서있기도 힘들정도로 거대했다. 정말 컸다. 진짜 컸다. 무지막지하게!!!!! 컸다. -_-;; 로버트 더 브루스나 윌리엄 월레스에 대해서 그리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었던 것도 좀 의외. 

 그 다음 인상깊었던건 다름아닌 스코틀랜드의 현대사다. 변화하는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의 전시관으로 현대 스코틀랜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곳곳에 영상물이 나오고 있어서 몇가지를 감상했다. 1970년대의 스코틀랜드 주거환경 개선사업영상를 감상했다. 70년대까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200년도 더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비좁고 비위생적이었다. 왜냐면 그 당시까지 아파트에 화장실과 샤워시설 등은 공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서 재개발사업에 착수해서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건데 홍보용 영상으로 당시에 제작된거다 보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들이 많았다. 새로 지어진 집에서 따뜻한 아침을 아내가 들고 등장하고 행복을 앞두고 자녀들과 맛있게 식사하는 가장의 모습.그리고 웃음꽃 만발!!ㅋㅋㅋ 으악 ㅋㅋ 오글오글 그 자체. 

 에딘버러에서 확실히 느낀건 에딘버러에 갔다고 스코틀랜드를 본게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스코틀랜드는 하이랜드, 고지대에 있다. 에딘버러 여행은 잘 짜여진 관광명소를 돌아다니는게 다였지만 하이랜드에서 봤던 아름다운 고지대 풍경과 내가 걸었던 수많은 숲길, 언덕들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공항가기 전에 기념품 가게 구경을 더 했는데 이미 모자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또 모자 구경을 하고 있엇다. 이것저것 써보고 나오려는데 중국여자애가 중국어로 모자를 들고 뭐라 묻는다 -_-; 젠장! 스코틀랜드 사람들만 아니라 중국애들까지 날 중국인 취급해 엉엉 ㅠ_ㅠ 내가 중국인 아니라니까 더 이상 질문을 안한다;; 중국인 아닌거 알았으면 그냥 영어로 물으면 되지 왜 안묻지;; 에딘버러에 중국인민박이라도 있나. 'ㅅ' =3

 공항가는 버스는 웨이브리 다리에서 100번버스인 AIR LINK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3.5파운드. 가는덴 30분. 10분간격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운영한다. 

 런던 히드로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정말 웃긴게 런던행 비행기가 5만원인데 기차가격은 10만원이 넘는다. 이상한 나라다.. 

 비행기 옆자리는 인도 청년이 앉았는데 이것저것 귀찮게 자꾸 말을 건다. 자기 할말만 계속하고 그래서 그냥 가는 내내 자는척 했다. 영화 '세 얼간이' 이야기하니 좋아하긴 하더라.. -_-; 인도는 안갔지만 방글라데시는 가봤다는 이야기하는 별로 안좋아했다. 파키스탄 사람이 아닌게 다행;;;[각주:4]

 런던 히드로에서 런더 페딩턴(Paddington??)역까지 가는 특급열차가 있고 페딩턴에 내려서 다른 지하철로 환승할 수 있는 런던 커넥션열차도 있는데 숙소인 러셀 스퀘어까지 가기 위해서 런던 커넥션 티켓을 샀다. 가격은 20파운드정도 한거 같다. 숙소는 대영박물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와이파이가 40분만 무료다. 속좁은 잉글랜드놈들! 스코틀랜드 최고! 헠헠;;
 
 Common room에서 멍때리고 있는데 동양인 여자애가 말을 건다. 이름은 미미. ㅋㅋ 봉미미도 아니고. 미미면 옛날에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여자애들용 인형이었는데. 미미쨔응이라니 ㅋㅋ 생긴게 대만사람처럼 생겼는데 의외로 캐나다 출신. 대만사람이라 생각한 이유는 얼굴이 중국인 얼굴인데 머리 스타일이 일본스타일이라서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이야기해보니 15살까지 대만에서 살았단다. 역시 그럼 그렇지.
 같은 동양인이라고 살갑게 말거는거 보니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도 했나싶었다;;나보고 몇번 방에서 자냐 묻길래 혼자 여행하나 싶어 물어보니 그렇단다. 그래서 런던 관광지 몇군데를 같이 가기로 결정! 호스텔에서 여행자들끼리 하는 이야기는 참 별거 없는거 같다. 달이 많이 기운 후에야 잠이 들었다. 잠자리는 불편했다. 침대가 내 키보다 작았다. 서양 사람들중에 키 180이 우습게 넘어가는 사람들이 즐비하고 2미터의 장신들도 많은데 왜 침대 크기가 이렇게 작은지 모르겠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자세로 쪼그려잤다. 그리고 그 다음날 잉글랜드 여행이 시작됐다.

  1. 스코틀랜드는 동군연합체제를 유지하다가 1707년 연합법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본문으로]
  2. 라기보다는 모르고 보면 그냥 지루하다는 생각만 가질듯. [본문으로]
  3.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멜 깁슨이 죽으면서 외친 유명한 대사. [본문으로]
  4.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과 독립전쟁을 벌여서 독립했다. [본문으로]
 영국도 당연히 솅겐 조약[각주:1]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코펜하겐에서부터 출국검사를 하는거 보니 아차 싶었다. 비행기를 타려고 할 때 티켓 끊어주는 직원이 나보고 비자가 있냐길래 그냥 스웨덴 거주허가증을 보여주니 통과시켜줬다. 에딘버러로 가는 내내 혹시 영국 방문하려면 따로 비자를 사전에 받아야되던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고 영국도 다른 여타 국가처럼 얼마간(아마도 90일?)은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었다. 에딘버러 공항은 꽤 소규모의 공항으로 그리 인상적인 모습이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스코틀랜드 영어 억양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어왔지만 스코틀랜드 사람과 이야기해보는 적은 없었다. 스코틀랜드 억양은 종종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도 사용되는데, 다음 영상을 추천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5FFRoYhTJQQ) 엘리베이터 음성인식기가 스코틀랜드 영어를 못알아듣는다는 내용인데 많이 과장된거겠지만.. 막상 대화해보니.. 음.. 어쩌면 저 음성인식기 오류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흰머리 입국심사관이 이것저것 묻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영어로 이야기해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고. -_-;; 스코틀랜드 영어는 내 귀에 어떻게 들리냐면, 잉글랜드 영어 음성에서 중고음부 음역대를 다 깎아버려서 저음부만 남은, 웅엉웅엉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뭐 어찌어찌해서 일정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야기해줘서 통과를 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갈 때는 100번 Air Link 버스를 이용하는데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10분간격으로 버스가 있고 가격은 싱글 3.5파운드, 리턴 6파운드이다. 공항에서 타면 거의 모든 관광명소가 다 모여있는 The Royal Mile 바로 코앞 Wavely Station이 있는 Wavely Bridge에 내려준다. 시간은 30분정도 걸린다. 

 에딘버러에 대한 첫 인상은 "아 여긴 급이 다르구나..."였다. 웨이브리 다리에서 보이는 로열 마일의 웅장한 모습이란.. 일단 오늘의 에딘버러 방문은 내일 하이랜드로 가기 위한 경유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냥 바로 숙소로 갔다. 

 숙소 리셉션 여직원은 양 눈썹에 송곳 비슷한 피어싱을 한 고스족[각주:2]으로 사뭇 악마의 뿔이 생각나기도 했다. 호스텔은 굉장히 소규모로 아늑했는데, 단점은 주방이 좀 작았다. 취사공간도 한곳 밖에 없어서 한참 기다려야되고. 

 주방에는 중국인 여자애들 세명이 중국인 종특인 소란스럽게 떠들기 스킬을 시전해서 왁자지껄했다. 한국에 있는 중국인 유학생들도 그렇고, 일본에서, 유럽 곳곳에서, 스웨덴 학교에서 본 중국인들도 하나같이 소란스럽게 떠드는데, 중국어 자체가 성량이 크지 않으면 대화하기 힘든 언어인가 싶가? 하는 의문도 들고 소리 크게 내어 이야기하는거 자체가 하나의 문화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뭐.. 중국사람은 이런 특성때문에 어딜가나 50m 떨어져있어도 한 번에 중국인이라는걸 알 수 있는거 같다. 뭐ㅋ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이 다 그런건 아니다. 내가 아는 중국애들 몇몇은 정말 말도 잘 안하는 성격이니까.

 방에 가니 캐나다에서 온 커플이 있어 이야기를 좀 하게 됐는데 유럽배낭여행중인데 그냥 도시만 정하고 세부일정은 없이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에딘버러에서도 뭘 해야될지 모르겠단다. 바닷가 이야기가 나와서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이야기를 하면서 열심히 수다를 떨었는데 알고보니 옆쪽 침대에 있던 또 다른 커플이 프랑스인이었다. 또 한바탕 이것저것 이야기 하나보니 밤이 깊어 잘 시간. 그런데 폰 충전을 하려고 보니 영국은 플러그 모양이 다르다.. 내가 가본 유럽 국가들 모두 우리나라랑 똑같은 전압을 쓰길래 영국도 그러려니 했는데 아니었다. 정말 특이한 3구짜리를 쓰는데 어댑터를 어디서 사야될지 고민이 됐다.

다행히 캐나다애들이 어댑터를 가지고 있어서 그 날밤은 무사히 넘겼는데 그 다음날 인버네스에서는 고생을 좀 하게 됐다. 

 다음 날 아침에 인버네스로 가는 기차표를 끊는데 왕복 티켓이 57파운드.. 우리 돈으로 10만원은 한다. 기차로 3~4시간 가량 가는 거리인데 KTX처럼 빠른것도 아니면서. 유럽에 살면서,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거지만 우리나라 교통운임을 정말 싸다. 유럽은 버스비,지하철비가 죄다 5천원,만원 이런식이고 기차값도 5,6만원씩 하니 기절할 지경.


 인버네스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수도로 지도상의 'A'지점에 있다. 에딘버러와도 엄청난 거리에 떨어져있고, 런던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다. 정말 영국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다.


 하이랜드에 온 이유는 하이킹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딱히 경로 계획같은게 없었다.그래서 그냥 언덕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고 나중에 확인해본 나의 여정은 위 지도와 같다. 참고로 굳이치는 산들과 고지대를 보려면 더 북쪽에 있는 isle of skye를 가야되는데 접근성이 너무 안좋고, 투어를 이용하기엔 돈이 없어서 포기했다. 돈에 여유가 있다면 현지 투어를 이용하는게 좋을듯? 나는 인버네스에서만 머물렀지만 기차타고 가는 4시간 가까이 입 벌어지는 풍경들을 계속 봤기 때문에 만족한다. 
 


 인버네스의 상징적인 이 다리는 굉장히 독특한 다리다. 왜 독특하냐면 걸을 때 다리가 흔들린다. -_-; 분명히 튼튼한 철골구조로 보이는데 흔들린다. 어떤 느낌이냐면 출렁다리를 건너는데 그걸 양쪽 끝에서 엄청난 힘이 억지로 꽉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 그래서 움직일때마다 다리가 흔들거리려고 하는데 어떠한 힘에 의해서 저지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눈꽃송이 모양의 장식. 건너편에 보이는건 인버네스 대성당(아마도).
 


 길거리는 뭐 대충, 이렇게 생겼다. 고층 건물도 없고 정말 조용한 동네이다. 인버네스엔 성이 있는데 성의 보존상태가 너무 좋아서 성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하고 올라가보진 않았다. 
 


 중간쯤 올라와서 바라본 인버네스. 외곽엔 B&B로 가득차있다. B&B란 Bed & Breakfast로 영국에서 흔한 숙박업소 형태다. 일종의 민박이라고 보면 되고 주차공간도 제공하고 ensuite room이므로 가족단위로 온 관광객들이 이용한다.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즐기고 싶어 다가가니 이미 닭둘기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옷(깃털)까지 훌훌 벗어던지고 배를 보이며 자고 있었다.. 아니 죽어있었다... -_-;
 


 몇시간을 걸었다. 경로를 정하고 간게 아니라 길이 없는 곳에 갔다가 다시 되돌아나오길 여러차례.. 언덕을 가고 싶은데 도저히 언덕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안보였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났다. 저 사진의 하얀 상자(utility box일까?) 에 앉아있던 노인은 지나가는 나를 불러세웠다. 노인은 영어인지 게일어인지 알 수 없는 극악의 억양과 발음으로 뭐라 주절주절하는데 나에게 "~~~를 찾고 있는가."라고 묻더니 대답도 안들어보고 혼자 어쩌고 저쩌고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는 ~~마일 밖에 떨어져있네." 하면서 지금 가는길로 가지 말고 오른쪽 옆길로 가란다. 정말 하나도 못알아들어서 그냥 알아듣는척 하고 가던 길 가려했더니 이 길이 아니라 옆길이란다;; 어쩔 수 반 강제로 옆길로 가게되었다.
 

 아무리 봐도 집만 몇채 있고 그 너머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노인의 성화에 못이겨 계속 가보기로 했다. 
 


 숲길이 계속 이어지다가 갈림길이 나왔는데 하나는 더 위로 가는거고 하나는 내려가는 길이었다. 위로 가는 길을 보니 출입통제 마크가 붙어있고 폐가까지 있어서 갈 엄두가 안나 내려가려 했는데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노인에게 안들키고 내려갈 생각을 궁리하다가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이 먼거리에서 날 찾은거지;; 

 그때 노인 앞으로 버스가 한대 지나쳤다.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노인은 없었다.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그 노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범상치 않았던 노인의 미소가 떠오른다.
...은 사실 버스타고 집에 감;;; 가서 축구봤을듯;;;

 아무튼, 노인의 매의 눈빛으로 내려가는 길을 저지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입금지 구역을 뚫고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끝없은 언덕을 넘고 넘었다. 노인이 뭘 알려주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찾던 전망 좋은 언덕임은 확실했다. 마지막에는 온 힘을 향해 달렸는데 그 끝에는 아래와 같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나무의자. 앉아서 인버네스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왼쪽 사진이고 오른쪽으로 한참이나 풍경이 더 이어지는데, 참 평화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앞에 보이는 바다는 다름아닌 북해다. 이 마을 가운데 흐르는 강은 그 유명한 네스호의 일부인데 네스호는 내가 마을을 내려다보고있는 이 언덕 바로 뒤에 펼쳐져있다. 네시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려졌는데, 어릴적에 책에서 봤을 때는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그때는 세상이 온갖 신기하고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먹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생기다보니 한편으론 우습고, 한편으론 아쉬웠다. 진짜였으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네스호는 인버네스에서 버스타면 정말 금방 갈 수 있는데 가진 않았다. 어차피 난 이미 네스호의 일부를 보고 있고, 네스호가도 봉제인형 하나 띄워두고 "이게 네시란다." 라고 할거 같아서 혼자 킥킥 웃기만 했다.
 


  바로뒤에는 검은 숲이 있었는데 얼마나 오싹한지, 숲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오는 듯 했다. 한 번 들어가볼가 했는데 주위에 출입을 막기 위해 쳐져있는 펜스들도 있고, 들어갔다가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포기했다. 앞에는 평화로움이, 뒤에는 으스스함이 있다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몇 번이고 느끼는거지만 나는 자연이 좋다. 프랑스 여행을 갔을 때도 파리를 버리고 노르망디로 간 이유도 파리의 도시적 분위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봄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다시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 가운데에는 이처럼 폐가도 있었는데, 우리나라 폐가는 그냥 말그대로 버리고 가버려서 탈선의 장소로 이용된다던가, 범죄의 온상 등이 되고 흉물스럽게 방치되어있는 반면에 이 곳 폐가는 저렇게 철저하게 모든 문, 창문을 봉쇄해놔서 그런 것들을 사전에 방지해놨다. 



 인버네스에서는 외지인, 특히 유색인종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내가 갔던 방글라데시나 우리나라의 불과 10여년 전 모습처럼 외국인이 지나가면 "우워워워어 외국인이다!!"하며 오도방정을 떤다던가, 신기하게 쳐다본다던가 하는건 없지만 그대로 한 번씩은 쳐다본다.

 인버네스에서 나는 영어 못하는 중국인이 되었는데 스코틀랜드 하이랜더들의 반응은 사뭇 웃기면서도 황당했다. 하이킹을 하면서 주택가를 지나갔는데 차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 안에는 할머니 한 분이 타고 있었는데 내가 지나갈 때 차 문을 급히 잠구는 것이 아닌가. 척! 하는 소리에 "저는 중국인 갱이 아닌데요;;" 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고. 좀 그랬다.

 
 하이킹 끝나고 돌아올 때 이미 6시가 넘어서 마트가 문을 닫아서 도미노 피자를 갔다. 도미노 피자에서도 알바의 말을 못알아들어서 정말 고생했다. 도대체 이게 정말 영어가 맞긴 한가. -_-; 도미노에서는 한판 사면 한판을 더 주는 1+1 행사를 하고 있길래 텍사스 bbq피자를 시켜서 룰루랄라 호스텔로 들고왔다. 그리고 열어주니 짜잔!! 젠장!! 누가 씬피자 달랬어..
 ㅠ_ㅠ 이건 도우가 하나도 없고 그냥 토핑만 있는 수준이었다.

 심슨가족 어느 에피소드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윌리가 시모어 교장의 계략에 속아넘어가서 이용당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You used me!" 하면서 울부짖는다. 이 장면이 생각해서 혼자 계속 킥킥댔다. 스코티쉬 놈들이 날 이용했어.. 흑ㅎ그..

 피자 나오길 기다리는데 10대 남자애 두명이 와 주문을 하고나서 날 보더니 둘이서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네 학교에 중국인이 있는데 걔가 뭔가 사고를 쳐서 애들한테 두들겨 맞았다느니 뭐 그런 이야기를 했다. -_-;

 피자가게 오기전 언덕 주택가에서는 한 가족이 놀고있었는데 꼬마가 날 보더니 'chink'(중국인 비하하는 말. 우리나라말로 번역하는 짱개정도?) 가 지나간다고 소리쳤다. 애 부모가 날 힐끗 바라보는데 뭔 생각을 했을까. 나중에 중국어 배워서 진짜 중국인인척 해야겠다.. 짱개라고 놀려대면 "아편 전쟁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이 빌어먹을놈들!"하면서 마구마구 때려주던가 해야겠다. ㅠ_ㅠ 

 호스텔에 도착하니 피로가 밀려왔다. 족히 6시간은 넘게 걸었다. 호스텔 직원은 스코틀랜드 억양.. 아니 발음의 절정을 보여줬는데 보증금 문제로 이것저것 이야기하니 나보고 "와워자나임?"이라 묻는다. 나임? 나인? 보증금이 10 파운드기 때문에 보증금 9파운드 맡겼냐는 질문인줄 알았고 10 파운드라 하니 다시 되묻는다. 생각해보니 나임이 아니라 name이었다.. -_-; What was your name? 나임과 네임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발음. 

 그 날 밤엔 파티가 있었다. 덴마크산 칼츠버그 맥주가 페트병으로 제공되는 평범한 파티였는데 스코티쉬랑 스코틀랜드 영어 이야기를 했더니 나보고, 잉글랜드 사람들도 못알아듣는 경우가 많다고, 내가 영어를 못하는게 아니라고 조언해줬다. 스코틀랜드 영어는 게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종종 단어도 다르게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아일랜드 사람들 발음은 더 이상한데, 발음만 이상한게 아니라 사람들 자체도 이상하다고 귀띔해주길래 한 때 아일랜드 역사에 빠져있었던 내겐 그냥 헛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이건 런던에서 일부 사실로 증명되었다.. -_-;
  
 잠자리에 들 때 문득 꽤 많은 '젊은' 한국 여행객들이, 호스텔이 아닌 한인 민박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좀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차피 여행을 어떻게 하는지는 그들만의 문제라서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견문을 넓힌다는 견지에서 보면 한인 민박은.. 글쎄다. 그 나라를 알려면 그 나라 사람들과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부딪히고 소통해봐야되는거 아닐까. 뭐 그냥 가서 사진만 냅다찍고 "나 영국 갔다옴ㅋㅋㅋㅋㅋㅋ" 이러는게 목적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그냥 그렇다.

 술기운 덕분에 늦잠 잘 줄 알았는데 왠걸, 새벽 5시에 깼다. 3시간도 못잤다. 하지만 첫 기차타고 에딘버러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길을 나섰다. 새벽 6시 47분. 인버에스에서 에딘버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1. 유럽 국가들이 맺은 국경 최소화 조약. 다른 나라로 넘어갈 때 출입국 검사를 안하는 이유가 이 조약때문이다. [본문으로]
  2. 고트족이 아니라 고스족.. 고스로리가 아니라 그냥 고스족이다.. -_-; [본문으로]
 토탈워 튜튼기사단 캠페인[각주:1]에서 신나게 리투아니아를 박살내다가[각주:2] '빌니우스[각주:3]'를 점령하면서 뭔가 생각이 났다. 분명히 이 도시에 대해 아는게 있었는데 뭐였지.. 하다가 생각난 것이 러시아에서 후퇴하던 프랑스군 유해 수천구가 2000년대 초반에 발견된 장소라는 것이었다.

 


 빌니우스에서 죽은 프랑스군은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구덩이 한 곳에 모두 함께 버려졌다. 흔히 러시아 코사크 기병대[각주:4]의 습격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코사크 기병대는 추운 날씨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을 이용했는데 식량부족과 추위로 시달리던 프랑스군에겐 끔찍한 시련이었다.  하지만 빌니우스의 프랑스군 유골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들 대다수는 전투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대다수는 유골에서 뼈가 괴사했거나 부서지고 망가진 흔적들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지나친 강행군과 추위, 배고픔때문이었다. 코사크 기병대는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에 숟가락만 살짝 올렸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군의 사상자가 엄청난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잠재적 가용자원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파리로 향하는 그 어느 길에서도 그들은 식량과 휴식처를 찾을 수 없었다. 이 유골들의 나이들을 추정해본 결과 대다수가 10대~20대 초반의청년들로 애국심에 불타 나폴레옹을 따라 러시아로 갔다가 변을 당했다. 나폴레옹은 파리로 돌아왔을 때 이들의 죽음을 축소하고 덮기 급급했다. 

 


 오랫동안 나폴레옹은 적어도 나에겐 영웅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요즘 들어 그게 아닌거 같다. 왜 나폴레옹은 '멋진 사람'이었는지 생각해보니 시작은  애니메이션 '사랑의 학교[각주:5]'덕이었다. 아마 92~93년 사이 방영되었을거 같은데, 쾌걸 조로랑 비슷한 시기에 본 기억이 나니까 그쯤 일거다. '사랑의 학교'는 여러가지 훈훈한 이야기를 단편애니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었는데 거기서 나폴레옹 이야기가 나왔는데 매우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폴레옹은 어릴 적에 가난해서 사과 사먹을 돈이 없어 가게 주변을 헤맸다. 이를 딱하게 여긴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나폴레옹에게 사과를 공짜로 주었다. 이후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이 가게로 돌아와서 자기 얼굴이 박힌 금화를 쏟아부어줬다. 금화를 그냥 준게 아니라 부하들 시켜서 한 자루를 '쏟아부어' 준게 이 만화의 포인트였다. ㅋㅋ 찬란하게 빛나는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들...



 이 만화의  교훈 바탕속에 황제 나폴레옹은 '훌륭한 인물'이라고 가정을 바닥에 깔려 있단 점을 생각해보면 왜 나폴레옹이 '멋진 사람'이라고 느껴졌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집에 있었던 위인전집에도 나폴레옹이 있었다. 고등학교때와 대학에서는 나폴레옹 평전이나 나폴레옹 전쟁사를 몇 번 읽었는데 아무래도 평전 자체가 업적을 기리는 면이 크다보니 그리 부정적인 생각이 안들었다. 자유세계의 수호자 나폴레옹이 맞는 말인가?

 하지만 히틀러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의구심이 들었다. 자꾸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겹치는 것이다. 공통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다른 국가를 침략했고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 영국과 러시아를 침략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 피폐해진 국가 경제를 되살리고 국민들을 일치단결시켰다.[각주:6]
  •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 반대세력을 모두 숙청했다.
공통점만 보면 다를 바가 없다. 나폴레옹이 히틀러같은 악마로 평가될 이유도 없고, 히틀러가 나폴레옹같은 영웅으로 평가될 이유도 없다. 차이점이 현대의 평가를 설명해줄까?

 나폴레옹은 자기 스스로가 유능한 인재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히틀러의 경우, 히틀러가 유능했다기 보다는 유능한 부하들이 많았다. 길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나폴레옹의 대표적인 부관들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기껏해야 미셸 네이[각주:7]나 뮈라[각주:8]정도를 대답하겠지만 히틀러의 부관들을 물으면 괴링,헤스,괴벨스,되니츠,롬멜 등 끊임없이 나온다. 

 나폴레옹은 유태인 등 소수 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각주:9]를 행하진 않았으나 히틀러는 그렇게 했다. 히틀러의 가장 큰 과오는 홀로코스트 범죄, 제노사이드인데 민간인을 대상으로한 전쟁범죄라는 점에서 보면 별로 차이가 없다. 어느쪽이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점에서 똑같다. 게다가 히틀러는 인종주의에 기반한 단순 광기로 대학살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자본의 대다수를 소유하고 있던 유태인을 견제해야 됐기 때문이다[각주:10].

 대학살에 대해선 전세계 여러 나라가 고개를 들 수 없는데, 히틀러의 제 3제국을 때려부순 뒤 팍스 아메리카나를 즐기고 있는 미국도 '운디느니 대학살'로 대표되는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의 죄를 피할 수 없다. 가깝게는 우리나라 노근리 학살사건도 있지 않은가. 학살 한 번 안해본 나라가 없다. 심지어 우리나라도 월남에서 베트콩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학살과 강간을 자행했다.[각주:11]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가장 큰 차이점은 히틀러는 스페인을 공격하지 않고 프랑코[각주:12]와 손잡았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침략했다. 이 스페인 침략에 관한 그림 한 점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저지른 수 많은 전쟁 범죄를 응집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프란시스코 고야[각주:13]의 <1808년 5월 3일의 학살>. 고야를 비롯한 전세계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이 왕정사회의 억압을 없애고 자유주의 세계[각주:14]를 만들어 줄거라 믿었다. 하지만 공화국 통령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다른 나라 민중들을 총칼로 억압했다. 고야는 이 그림을 나폴레옹 몰락을 축하하며 조국 스페인의 독립을 위해 피흘리며 싸운 수 많은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그렸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에 분노하며 보나파르트 찬가 사본 악보를 찢어버렸다. 보나파르트 찬가가 바로 그 유명한 <영웅>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던 시기 독일은 극빈 국가였다. 1차대전 패전 이후 실업자들은 넘쳐났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난로용 나무 장작을 돈 주고 사는거 보고 나무 장작 값에 해당하는 돈을 불태우는게 더 효율적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총체적 난국을 히틀러는 30년대에 이르러 모두 해결했다. 앞서 이야기햇듯이 유태인,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도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결정적으로 히틀러는 군비 재확장 정책[각주:15]을 통해 독일을 전쟁 직전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 중 하나로 만들었다. 사족으로, 아카데미를 휩쓴 <킹스 스피치>를 단순한 상업영화로 보는 시각[각주:16]도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나치 독일의 등장 시기 영국 왕실, 내각의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는 꽤 정치적인 영화다. 조지 6세가 아닌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계속 유지했다면[각주:17] 2차대전은 어떤 양상으로 돌아갔을지는 예측하지 어려울 것이다. 체임벌린이 영국 왕실의 정치적 입장을 조율하면서 고뇌의 시간을 보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영웅이었다. 미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프랑스 처녀 500여명을 강간한 일을 이야기하지 않듯이 제 3 제국도 전쟁 범죄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소피 숄(Sophie Scholl)[각주:18]과 같은 이들은 이 사실을 알고 저항했으나 그 목소리를 울려퍼지지 않았다. 히틀러의 군대는 잘나갔고, 유럽을 정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패했다. 나폴레옹의 군대도 잘나갔고, 유럽을 정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패했다. 둘 다 끔찍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 같은 논의로 두 인물의 차이를 상당히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그럼 결정적으로, 왜 히틀러는 악의 대명사, 나폴레옹은 평가가 혼재하지만 '영웅'으로도 묘사되는걸까?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나폴레옹은 19세기 사람이고 히틀러는 20세기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따라 연합(Association)강도가 약해진다는 심리학 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는 20세기의 유산이 그대로 숨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는 '정치가'라기 보다는 미치광이,사탄 쯤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전 세계를 휩쓸었던 수 많은 군인들, 간단하게 칭기즈칸의 예를 보자. 칭기즈칸의 군대는 저항하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며 전 세계를 휩쓸었고 우리나라의 경우엔 고려를 자주독립국이 아닌 일개 번국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 대다수는 칭기즈칸을 고려를 침략한 악랄한 사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나라는 두 번의 호란을 통해 형제지의 국가 조선을 군신지의, 대청국속 조선으로 대표되는 수직적인 속국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 어느 출판물에도 "빌어먹을 청나라놈들!"이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그 이후 조선의 북벌운동이나 북학파의 등장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 일본의 식민 통치가 있는데, 지금도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은 좋지 못한 편이지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일본인들도 한류에 열광하고 있다.[각주:19] 세대가 바뀌었고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경우도 현대 유태인이 미국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을 위시로 한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한 각종 만행을 통해 (물론 일부 의견이긴 하지만) "그때 히틀러가 유태인을 쓸어버리지 못한게 안타깝다. 사악한 유태놈들!"이라는 여론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나폴레옹의 평가는 다수의 긍적과 소수의 부정이 혼재하는 것이다. 요즘들어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의 평가는 후대가 한다는 말이 이렇게도 와닿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역사는 사람에 의해 쓰여지고 언제나 '승자의 역사'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현재의 평가가 언제나 '올바른' 평가인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1. 미디블2 토탈워: 킹덤즈 [본문으로]
  2. 실제 역사에서 13세기 튜튼기사단(독일기사단)은 리투아니아 완전 점령에는 실패했다. [본문으로]
  3. 리투아니아의 수도. [본문으로]
  4. 15~18세기에 있었던 준 군사조직. 정규군은 아니다. [본문으로]
  5. 책 '사랑의 학교'와 일본 애니 '사랑의 학교 쿠오레'와는 관련이 없는거 같다. 내가 본건 뭐지? [본문으로]
  6. 프랑스는 혁명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대 프랑스 동맹이 수 차례 형성되어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독일은 1차대전 패전 이후로 경제가 붕괴 국가 존립의 위기에 이르렀다. [본문으로]
  7. 프랑스의 장군. 직급은 원수. 나폴레옹 초기부터 마지막 워털루 까지 두루 참전했다. [본문으로]
  8.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 중 하나로 이탈리아 정복 후 나폴리 국왕이 되었다. [본문으로]
  9. 제노사이드는 민족이나 국민,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 등 특정 집단을 학살하는 대량학살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0. 알다시피 21세기 현재에도 세계 자본의 다수를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다. 이는 유태인이 수백년전부터 은행업이나 고리대금업 등 돈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였고 그게 계속 이어져내려오다 자본주의 시대를 만나 소위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본문으로]
  11.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전쟁 때 미군이나 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이유도 빨치산,북한군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본문으로]
  12. 너무나도 유명한 스페인의 독재자. 말년에는 정신차렸는지 '정상적으로' 살다가 죽었다. [본문으로]
  13.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본문으로]
  14. 나폴레옹이 자유주의 이념을 전파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론 나폴레옹이 전파했다기 보단 대혁명이 전파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족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본문으로]
  15. 1차대전 패전 이후 군대 구성 등에 제약을 받았는데 이를 타계하고 국방력을 강화했다. 35년 르카르노 조약이 가장 상징적인 사건. [본문으로]
  16. 배경지식이 부족하면 그냥 재미로 보는 영화.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에 메타포같은건 찾아 볼 수 없다. [본문으로]
  17. 에드워드 8세를 히틀러를 지지했고 미국인 이혼녀와의 사랑을 계속하기 위해 왕위를 내놓았다. [본문으로]
  18. 소피 숄은 독일의 대학생이었는데 오빠와 또래 청년들과 함께 (아마도)백장미단이었나? 반 나치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본문으로]
  19. 일본인들 대다수는 독도 문제에 관심이 없는데 관심이 없는 이유는 아예 그 문제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세탁하러 내려갔는데 이전 시간 예약한 사람[각주:1]이 세탁 돌려놓고 찾아가질 않았다. 이미 내 시간이 1시간 가량 흘렀데도 안찾아갔길래 깜빡했나 싶어 일단 세탁물을 꺼내고 내 껄 돌리는데 어디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세탁실 창문을 열어서 세탁실 전기를 끌어다가 바로 옆 잔디에서 라디오를 듣고 노는 애들이 있었다. 어떻게 세탁실 전기를 끌어갈 생각을 하지;; 

 한 시간동안 산책 좀 하고오니까 그 세탁물 안찾아 갔던 사람이 열심히 건조기에 자기 세탁물을 넣는 정말 황당한 상황이 연출됐는데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었다. 내가 들어와서 hej 하는데도 당당하게 건조기를 쓰고있다. 건조기 안써서 필요없다고 하곤 올라왔는데 SDU 성님들[각주:2]이 아닌게 다행;; 아직 두 달 정도 남았지만, 이미 결론내린게 스웨덴 사람들 의식은 몇몇 부분에서 좀 꽝인듯..

 

  
 
  1. 세탁 예약시간은 세시간씩이다. [본문으로]
  2. 스웨덴 민주당 청년모임? 청년연합회? 청년동맹? 민주당 Youth 그룹인데, 스웨덴 민주당은 스웨덴 극우정당 중 하나. 일부 스웨덴 언론에선 나치즘 정당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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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3일 수요일  (0) 2011.04.14

 
 겨울에 안추워서 좋았는데 봄이 늦게 오는건 별로다. 잎사귀 좀 나려나 했더니 해가 나와야 꽃이 피던가 하지. ; 4~5일 흐림, 이틀가량 맑음의 날씨가 근 한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데 무슨 삼한사온도 아니고;; 

 이번에도 4일간 흐렸다가 날씨가 맑아졌다. 거리에 넘실대는 사람들. 아파트마당 잔디에도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요즘 들어선 좀 불쌍하기도 하다. 하긴, 역시 북유럽은 겨울이지[각주:1].


 아파트 바로 옆에 작은 언덕이 있길래 사진 찍기 좋아보여서 밤 10시에 삼각대와 카메라를 챙겨 나갔다. 몇 번 테스트샷 찍다가 알게된건데, 단렌즈는 초점 무한대가 되는데, 번들렌즈는 초점거리에 대한 표기가 없어서 어느 정도가 무한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광각 사진은 실패. 그렇게 거대하고 머나먼 우주도 단렌즈 앞에선 너무 가깝다. 내가 어느 곳을 찍고 있는 지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30초간격으로 끊어 찍었다. 북두칠성을 찍었는데 별의 이동방향을 보고 북쪽이란것만 알 수 있지 이게 북두칠성인지 북두신권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다. -_-;



 꽤 어두운 곳에서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건물 조명이 장기간 노출되면서 쌓이고 쌓이다보니 상당한 양이었다. 왜 창문에선 사진을 찍을 수 없는지 이해가 갔다.[각주:2] 오랫동안 기다리는게 전부다이다 보니 이것저것 잡생각 좀 하면서 별을 헤아려 보았는데, 예전처럼 입 벌린 채 감탄하고 있지 않다는걸 알게 됐다. <호두껍질 속의 우주>[각주:3]때문인가?  천문학은 사실 물리학이란걸 알게 된 것과 두 번째 재앙과 합쳐 삼대 재앙이었다. 학문으로서의 천문학이 이렇게 난해하고 재미없다니. 두 번째는  중학교 2학년 때 일어났는데 10만원 가까이 들여 쌍안경 하나 장만해놓고 한참 들떠있었다.. 그리고 <작은 망원경으로 시작하는 천체관측의 첫걸음>[각주:4]이란 책도 시내 모든 서점을 다 뒤져가면서 정말 힘들게 샀는데.. 그랬는데 한 달만에 집에 도둑이 들어서 쌍안경만 가져갔다. 쌍안경만 가져갔다는건 가방은 놔두고 쌍안경만 가져갔다는 말. 

 '몇 십억 년 후에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 은하가 충돌한다는데.. 그 때 과학 기술이 잘 대처할 만큼 발달해있을까?' 이런 생각하다가 갑자기 눈 앞을 스쳐가는 무언가를 보았다. 유성이었다. 불빛이 적은 곳에 있으니 유성도 보는구나. 대항해시대3에선 유성이 나오면 부관이 항상 소원을 빌라고 한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소원은 비밀이란다. 비밀이면 말하질 말던가;; 

 미미한 인간의 존재,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뭐 이런건 근 몇 년 사이에 여러 매체를 통해 우주의 거대함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서 이젠 식상한 감도 있다. 'ㅅ' =3 그래도 오랜만에 찾아본 blue pale dot에 대한 세이건의 감상은 명문중의 명문이다.

지구에서 64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찍은 사진.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 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 지도자들, 인간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이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자들이 보여준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서로를 얼마나 자주 오해했는지, 서로를 죽이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 증오는 얼마나 깊었는지 모두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을 본다면 우리가 우주의 선택된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 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1. 은 단지 블랙메탈과 대항해시대3 게임만으로 만들어진 편견. [본문으로]
  2. 건너편 아파트 조명이 너무 강해서 별이 찍히지 않는다. [본문으로]
  3. 호킹이 쓴 천문학 교양서적...인데 어렵다. -_-; [본문으로]
  4. 지금 찾아보니 절판됐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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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장한 4월 14일 목요일 이야기.

 역시나 날씨는 흐렸고, 해야할 일은 많았다. 비극적인 14일은 블랙데이[각주:1], 고스트투어날,미디어처리 2차텀 마감날, 웹개발알바 중간마감날,학교 후배 여친 생일날-_-; 등등.. 여러가지로 뒤범벅되어있었는데, 가장 중요한건 텀인지라 아침부터 텀을 시작했다.

 텀 제안서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교수님 표현에 따르면 제안서는 정말 clear하다는데, 이렇게 unclear한 제안서는 처음봤다. 심지어 무슨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되는지도 파악이 안되는 수준. 점심을 pc실 밖에서 대충 쳐묵쳐묵하고 교수님 방에 가서 또 질문하고 다시 텀을 했다. 코드는 점점 더러워지고 더이상 뭐가 뭔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는데 시간은 어느새 흘러 4시 30분. 고스트 투어를 가야할 시간이었다.

 고스트 투어는 룬드에 숨겨진 기괴하고 끔찍한 비화들을 들려주는 투어인데, 성당에 밤에 있으면 오르간이 저절로 연주된다던가, 누구 발소리가 들린다던가 하는 6살짜리 꼬마나 믿을 멍멍이 소리부터 룬드의 중세시대에 있었던 피의 사건들까지 아우르는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투어였다.

 출발하기전에 서성이다가 알게됐는데 같이 투어관람하게된 여자애가 사실 파티에서 만났던 사람이자 우리 아파트 사는 사람이고, 심지어 같은 수업도 듣는 사람이었다. 근데 왜 난 모두 다른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지. 안면인식장애인가;;

 


 투어할 즈음엔 날짜가 괜찮아져서 사진도 이쁘게 나왔다. 룬드 대성당은 11세기에 지어졌는데 전설에 의하면 트롤이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안에 가면 트롤상도 있다. 이 성당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여러가지 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게 성당 뒤편 벽이 전면부와 다르게 그을려있는 이유다. 그 이유는 대화재가 예전에 발생해 벽 일부가 불에 탔기 때문. 성당의 가장 오래된 부분을 자세히 보면 사용된 돌 종류가 다르다는걸 알 수 있다. 초기 성당은 사암으로 지었기 때문이라는데, 정말 약간은 셰일느낌의 사암으로 되어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망치와 정으로 열심히 두드리면 금방 구멍이 뚫릴듯.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건 시간표에 얽힌 이야기였다. 룬드 대학교 수업 시간표는 10시~12시같이 2시간 단위로 되어있는데 사실 수업시작시간은 10시 15분이다. 왜 시간표엔 10시라고 해놓고 시작은 15분에 하냐면, 옛날 학생들은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가는 길에 반드시 지나쳐야하는 성당 종소리가 자신이 집에서 떠난지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는 시계였다고 한다. 이 종소리를 듣고 수업 시작이 15분 남았으니 좀 서둘러야겠구나.. 뭐 이랬다는 이야기. 나같은 경우엔 자전거타고 지나가면서 휴대폰시계를 꺼내볼 수 없어서 성당 종소리에 많이 의지했었다. 
 

 난 왜 저것도 못봤을까 ㅋㅋ 매일 지나다닌 길인데. 저 뒤 돌에 새겨진 남자. 돌을 뚫는 남자? 돌을 부수는 남자?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저런게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이 옆엔 고대 바이킹 무덤도 있는데 무덤 주위에 룬스톤이 여러개 있다. 판타지게임에서나 보던 룬스톤이 학생회관 바로 앞에 있다니. 근데 가이드 말로는 사실은 바이킹 무덤이 아니라 쥐무덤이란다. 학생들이 때려잡은 쥐 시체를 넣어놨다나 뭐라나.
 


 저 집 앞쪽 골목에서 학생이 다른 학생을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엔 학교내에 법정도 있고 교도소도 있고 사형장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문제가 시체가 학교와 도시의 경계에 있어서 어느 관할인지를 두고 한참 시끄러웠는데, 결국 범인은 잡혔고 어찌어찌해서 학교 법원 관할로 사건이 넘어가서 학교 사형장에서 사형당했다. 학교 자체 법정이 있을정도면 1700년대 쯤 일이려나. 이 살인사건으로 저 집은 The house of sin으로 불렸는데 가장 윗쪽 꼭대기 방에 사는 학생은 The highest sinner라고 불렸단다. 
 


 몇 번 언급했던 철학과 건물. 실제 이름은 kungshuset으로 왕의 집이라는 뜻. 덴마크 국왕와 룬드 대주교와 관련된 일화와 있었는데 잊어버렸다. 아.. 역시 일기는 그날 바로바로 써야되는듯.
 

 룬드는 알고보니 피의 역사로 가득찬 곳이었는데, 두 창문 사이 벽이 다른 부분과 달리 부서진 곳을 보수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중세시대에 전투를 하다가 박살이 나서 그렇단다. 룬드 대주교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군대도 보유했단다. 룬드 대성당 주위는 일종의 요새였다. 그래서 룬드 성당 뒤쪽 뜰에선 수많은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고, 효수[각주:2]가 행해지던 곳이기도 했다. 이 도시엔 아직도 중세시대의 흔적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다. 다른 예로 룬드 중앙광장은 광장(Square)이 아니다. 사각형이 아닌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건 11세기 스타일의 광장이라 한다. 다른 유럽 도시들도 그렇겠지만, 이곳도 그렇고, 꽤나 부러운 점 하나는 오래된 건물들이 참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게 부러운 이유는 그렇게 오래된 건물들이 관광지나, 보존을 위해 출입이 금지된게 아니라 아직도 상업공간,주거공간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1세기면 십자군 전쟁도 일어나기 전인데 이 때 지어진 건물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스웨덴 꼬마애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건 성당과 마찬가지로 매일 지겹게 지나다니던 성당 뒷골목 가구가게 옆집이 룬드 대주교(아크비숍) 집무실이었다는 사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가던 곳이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찬 곳이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투어가 끝나고 텀을 마감하기 위해 다시 학교로 가야했다. 집에 갈 수 없어서 케밥가게에서 식사를 했다. 오래산 프로페셔널 -_-; 룬드 시민인양 뜻 모를 케밥 요리를 스웨덴어로 자연스럽게 달라했더니 키클링(닭)이냐 ??? 냐 묻는데 뒷 단어를 몰라서 온지 얼마안된 외국인인게 들통났다;;[각주:3] 케밥하면 소고기나 양고기로 통일인줄 알았는데 닭고기도 있었다. 맛은 뭐.. 갈릭소스빨; 집에서도 쉽게 요리 할 수 있을거 같다.

 아무도 남지 않은 학교로 다시 가서 텀을 했다. 텀이 끝난건 새벽 두시. 데이빗이 보고서를 끝내고 교수님에게 메일까지 보내고나자 온 몸에 힘이 쫙 풀리면서 피로가 밀려왔다. 지상으로 올라와 문을 나서니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엄청난'[각주:4] 안개가 나를 맞이했다. 이 신비로운 자연 현상 보려고 그렇게 고생을 했나. 

 역시 교환학생은 어디까지나 관광객이 아니라 학생이다보니 공부하면서 재미를 느껴야 제맛인듯.. 

 
  1. 이런 데이 시리즈 참 어거지같은데, 짜장면이 맛있으니 블랙데이만큼은 봐준다;;; 하아.. [본문으로]
  2. 목을 잘라서 창이나 기둥에 걸어두어 형벌. 일벌백계의 의미로 많이 이용됐다. "니들도 나중에 이렇게 되는 수가 있다. 조심해라~" 이런 이런 의미? ㅋㅋ [본문으로]
  3. 은 그냥 농담. 'ㅅ' =3 겉모습부터 외국인인데 뭘;; 머리속으론 데이빗에게 "run for your life!"하고 그대로 도주하면 심슨같은 장면이 연출될거 같단 생각에 킥킥댔다. [본문으로]
  4. 사진 찍어둘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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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부터 다시 날씨는 흐려져서 해보는 일이 없어졌다. 게다가 매일같이 쏟아지는 부슬비덕에 기온은 내려가고 바람은 '강풍'이 아니라 '광풍'수준. E 빌딩 지하는 지하와 지상의 애매한 경계[각주:1] 사이에 있어 라디에이터가 있어도 춥기만 했다.

 한 공간에 오랫동안 있으면 주위 사람들의 행동도 어렴풋이하나 보게되는데, 여러날이 흐르니 일종의 문화랄까, 관습이 보였다. 대표적인것이 PC실[각주:2]이 시장바닥수준으로 시끄럽다는 것인데, 잡담을 하는건지 과제 토론을 하는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시끄럽게 떠든다. 아마 락밴드가 난입해서 콘서트해도 아무렇지 않을 듯. 

...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까 다른 스웨덴인들 중에도 떠드는 사람들에게 안좋은 눈길을 보내는 치들이 여럿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러므로 이건 일부 스웨덴 애들이 그냥 개념이 없는거였다.

 지하 카페테리아에 가보면 점심먹고 안치운 쓰레기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버거킹에서도 그러는걸 예전에 봤으니, 종합해보면 여기 나라 사람들 도덕 의식은 꽝인거 같다. 여러번 언급한 무단횡단도 그렇고. 

 카페테리아 자판기는 정말 이상했는데, 친구가 10크로나를 넣고 5크로나짜리 음료수를 뽑았다. 그러더니 잔돈으로 10크로나가 나왔다. 그래서 공돈이다 싶어 5크로나를 넣고 음료수 버튼을 누르자, 음료수는 안나오고 동전이 반환되서 나왔다. 그래서 다시 동전을 넣고 음료수를 선택하니 음료수가 안나오고 동전은 그대로 기계가 먹었다. -_-;

 근 몇일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텀을하고 집에 간다. 집에 도착해서 밥을 먹으면 몰려오는 피로감에 허덕이다 잠든다. 일어나면 다시 텀하러 학교로. 한국 있을 때도 공부하는건 비슷했는데 왜 더 피로하지.

 아무 일이 없을 때는 비참함을 느꼈다. 특히 방학 끝날 무렵에. 새학기가 빨리 시작되서 하루라도 어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하지만 정작 학기가 시작되고 과제와 시험에 치여살게되면 빨리 방학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순환이 졸업무렵까지 반복되더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라서, 지금은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이지만 이게 끝나면 또 일을 갈구하게 될거란 걸 알고 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따지고보면 극단적인 쏠림에서 오는 불균형이 문제인데, 스웨덴 학생들은 꽤 영리한 해답을 찾은 듯 하다.

 예전에도 적었던거 같은데, pc실에 있다보니 확실히 알게되었다. 그렇게 시끄럽던 장사꾼같은 학생들도 오후 5시가 되면 모두다 후다닥 사라진다. 24시간 오픈 pc실인데도. 정말 단 한 명도 안남는다. 물론 남는 일부 학생들도 있지만 거의 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아침 8시 1교시를 가면 이미 학교앞의 자전거정류소는 만원인데, 이를 통해 추론해보면 여기 학생들은 아침 8시~오후 5시까지 집중해서 학교생활을 하고 집에 가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듯 하다.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직장인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각주:3] 학생들이 저런 칼같은 생활을 즐기는걸 보니 참 신기하면서도 부럽기도 하다. 사실 한국에서도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데, 아니, 따져보니 이곳은 쿼터제고 한국은 학기제라서 하루에 듣는 강의 시간 차이 때문에 저녁공부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인듯. 

 내일은 고스트 투어[각주:4]가 있는 날인데 2차텀 마감이 내일인 관계로 투어갔다와서 다시 텀을 하는 좀 황당한 스케쥴이 되버렸다. 투어를 투어로 즐기지 못하고 머리 속엔 계속 허프만 코딩과 DPCM 인코더가 돌아가고 있을거 같다.


  1. 경사면에 세워진 듯 하다. [본문으로]
  2. 건물 지하 전체가 PC실인데 PC실 숫자만 10여개가 넘는다. 그룹스터디룸도 '매우' 많다. [본문으로]
  3. 사실 직장인들도 야근덕에 5시 퇴근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본문으로]
  4. 룬드에 숨겨져있는 괴기하고 으시시한 이야기를 도시를 돌아다니며 들려준다는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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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에 텀을 시작했다. 근 5일만에 해가 떴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창문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얼마나 좋은지. 여기 사람들은 햇빛만 나오면 '환장'을 하는데, 요즘 정말 공감한다. 오랫동안 해를 못보다니 갑자기 해를 보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음침한 블랙메탈이 북유럽에서 탄생한 이유도 이해가 가고. 

 거리엔 아침부터 노천카페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바글바글거리고 거리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도 등장했다. 게다가 드디어 나무에서 잎사귀가 나올 조짐이 보인다.. 이 말인 즉슨.. 스코틀랜드에도 슬슬 잎사귀가 나온다는 말이지. 하하하. 어서 예약해야겠다.

 1차텀의 문제는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알고리즘 과정 하나한를 다 분리해서 돌려보니 몇가지로 축약이 되긴 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점심먹고 나서도 해결이 안되다가 기적적으로 문제가 자료형이 unsigned integer라서 negative값이 저장되지 않기 때문이란걸 깨달았다. 그래서 고치고 테스트하길 몇번째.. 드디어 decimation하기 전 이미지가 완벽하게 나왔다. 이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잠시 과자를 사러갔는데 정말 특이한 자판기를 봤다.

 이 자판기는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른 뒤에 오른쪽에 문을 열고 손을 집어넣으면 왼쪽의 타원이 돌면서 물건이 나온다. -_-; 처음엔 문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해서 도대체 어디로 물건이 나오는가를 두고 데이빗과 한참이나 고민했다. 


 글로 적으면 정말 순식간인데, 과정은 7시간 가까이 걸렸다. 저거 띄우려고.. 아.. 결과적으로 교수님 소스는 하나도 도움이 안됐다. 끝내고 나서 얼마나 후련한지 모른다. 09년에 CS텀  끝냈을 때 만큼[각주:1]은 아니지만, 날씨 덕인가.. 굉장히 기뻤다.

 돌아오는 길에 스웨덴인들이 무단횡단을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아침에는 라뱅쓰리런도 아니고 교차로에 있는 세개의 횡단보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단횡단이 일어나는 것을 구경하는 경이로운 체험도 했다. 참 신기한 나라.

 또 재미있는건 얼추 1m50은 되보이는 거대 불독을 애완견으로 데리고 다니는 사람을 봤는데, 여기 사람들이 '거대 사이즈'의 개를 많이 키우긴 하지만 불독을 저 크기로 키우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저 사람 집에 도둑이 들어갔다간 팔 한짝 잃고 인생마감할거 같았다. 


 동네 빵집에 이스터라고 온갖 상품이 다 등장했다.
 


 ㅋㅋ 귀요미 병아리 인형. 



 
  1. 거기까진 좋았는데 텀하느라 교양 공부를 못해서 러시아문화 시험을 망쳤다. 러시아-한일 교류에 힘쓰는 교수님 수업 시험에 푸틴의 정치행보를 비판하는 멍청한 짓을 해버렸다. -_-;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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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The set of  is the set of all n-dimensional vectors   such that
 
2. 대체 정의 (Alternative definition)

The  can definition as the set of vectors x such that




문제.

Consider a binary memory-less source where P(0) = p and P(1) = q = 1 - p. In a sequence of n symbols, the share of 1s tends to q as n becomes large.

a) How many sequences of length n has the share of ones equal to q? 
b) Show that as   the number bits per source symbol required to represent the sequences in a) is the entropy, h(q) = h(p)


 풀이

a) n과 q를 곱하면 정수가 아닌 경우가 생기니까 반올림을 해주어 계산해야된다. 그러니까 nq가 아니라 [nq]. 확률계산이므로 그냥  이걸 계산하면 된다.


 
b)
a번처럼 nq나 np가 정수가 아닐 수 있는데 그냥 근사값을 가진다고 
예상하고   라고 책에서 친절하게 설명해놨으므로 -_-; 엔트로피 공식에 충실하게 계산하면 된다. 계산과정은 다음과 같다.


증명 문제풀이 포인트는 주어진 레퍼런스를 이용해서 잘 끼워맞추는거 아닐까. 

1. BMP: 비트맵 이미지는 여러 비트의 종류가 있는데 최근에 가장 널리 쓰이는것은 24비트이다. 

비트맵 행렬


비트맵은 R G B  세가지 채널로 구성되는데 이는 위 그림에서 보다시피  Red, Green, Blue의 약자이다. 이미지는 행렬(Matrix) 로 이뤄져있는데 우리가 보는 이미지를 실제로 뜯어보면 

( 0 33 32 32 244 ) 
( 0 102 32 21 24 ) 
( 0 255 55 2 244 ) 
( 0 255 32 2 255 )  

 

이런 식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해당 숫자 번호들은 0~255까지 색상 정보를 담고있는 하나의 픽셀(Pixel)이다. 즉 R,G,B 세가지 행렬이 겹쳐져서 보이는것이 비트맵 이미지인 것이다. 행렬방식으로 이뤄져있는 것은 다른 색공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참고: RGB외 YUV(YCbCr)의 색정보 범위는 다르다. 0~255가 아니라 -128~128 등등 제각각.

YUV

YCbCr


2. YUV: YUV는 TV나 비디오 영상에서 사용하는 색 표시방식이다. 옛날에 흑백TV만 있었을때는 색상 정보가 필요없고 단지 밝기 정보만 필요했다. 하지만 컬러 TV가 만들어지자 색상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흑백TV사용자에겐 영상이 흑백으로, 컬러TV 사용자에게는 영상이 컬러로 나오게 해야된다는 점이었다.[각주:1]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이 방식인데, U,V는 색차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럼 Y는 무엇인가? '밝기(휘도)'를 나타낸다. YUV방식은 아날로그 인코딩 방식이고 절대 색공간이 아니라 RGB 공간을 변환해서 만드는 색 공간임을 명심해야 한다.  
 
3. YCbCr: YUV와 비슷한데 이것은 디지털 방식이라는 차이가 있다.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에선 약간 변형한  방식을 이용한다.(ITU-R BT.601) Cb Cr은 색차 정보를 가지고 있고 Y는 YUV에서 처럼 밝기 정보를 담고 있다.

YUV(CbCr)은 공통적으로 RGB정보를 인코딩해서 만들어지는데 다양한 공식이 존재한다. 보완의 보완을 거듭해서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Y = 0.299R + 0.587G + 0.114B

U = (B - Y )0.5643

V = (R - Y )0.7132

Y = 0.299R + 0.587G + 0.114B

Cb = (B - Y )0.5643 + 128

Cr = (R - Y )0.7132 + 128

 
각 채널들은 행렬이므로 모든 계산은 행렬연산으로 이뤄진다. 인코딩된 정보를 다시 RGB로 디코딩할때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쓴다.

G = Y - 0.714V - 0.334U

R = Y + 1.402V

B = Y + 1.772U.

G = Y - 0.714(Cr - 128) - 0.334(Cb - 128)

R = Y + 1.402(Cr - 128)

B = Y + 1.772(Cb - 128) 


인코딩, 디코딩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률은 거의 미미하다. (픽셀을 64라고 가정했을때 인코딩과 디코딩을 거쳤을 때의 값은 63.93xxx 정도)



그림 이미지는 wikipedia 출처. 

  1. 컬러 방송 시대가 개막했다고 흑백 TV로 더이상 방송을 못보게 하기엔 흑백 TV 보급률이 너무 높았다. 아니, 모두가 흑백 TV를 썼엉쓰니까 당연한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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